[고등학교 수학여행]
(이 글은 나의 최초의 본격 여행기이기 때문에 일기장에 적어둔 것을 다시 옮겨 적으며,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전에도 한 번 컴퓨터에 옮겨 적었던 모양인데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130320일 경)
경로
(83년 4월 12일)
영남 고등학교 - 동부 정류장 - 반야월 - 하양 - 평사 휴게소- 금호 - 영천시 - 직산 - 건천 - 경주 - 신당 - 효명 - 안강 - 부조 - 효자 - 포항시 - 의창 - 덕성 - 광천 - 장사 - 구계 - 강구 - 영덕 - 도곡 - 영해 - 병곡 - 금곡- 삼율 - 평해 - 월송정 - 척산 - 사동 - 덕신 - 매화 - 노음 - 울진 - 죽면 - 부구 - 동해 휴게소 - 나곡리(강원도) - 원덕 - 임원 - 용화 - 초곡 - 매원 - 동막 - 부남 - 교가 - 하맹방 - 상맹방- 삼척 - 죽서루 - 동해 - 묵호 - 초구 - 망상 - 옥계 - 낙풍 - 금진 - 견남 - 명계 - 산성우 - 정동진 - 안인 - 강릉시 -미도 - 방대 - 주문진 - 인구 - 하관3리 - 양양 - 낙산사 - 송월 여관
(4월 13일) 설악산
신흥사 - 울산*흔들 바위 - 여관 - 비선대 - 비룡*육담 폭포 - 여관
(4월 14일)
- 속초 - (낙산사) - 양양 - 북평 - 한계령 - 오색 약수터 - 장수대 - 천마대 - 원통 -인제 - 신남 - 지은 - 성산 - 홍천 - 상창봉 - 학당 - 횡성 - 수산 - 원주 - 간매 - 여주 (세종대왕, 왕후, 효종) - 청반- 장호원 - 왕장 - 신양- 주덕 - 대소 - 달천 - 충주 - 세성 - 수안보 - 수옥정 - 향촌 - 문경 - 사성 - 신현 - 불정 - 점촌 - 함창 - 양정 - 백원 - 상주 - 신촌 - 상곡 - 동관 - 속리산 - 여관 ----
(4월 15일)
상주 - 상촌 - 낙동 - 궁기 - 월호 - 상장 - 금암 - 다부 - 칠곡 - 서대구 - 학교
[4월 12일]
(정말 거의 만 30년 전의 여행을 옮겨 적으면서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모습의 공통점과 차이점, 글쓰기의 버릇 등을 살펴보려 한다. 나는 나의 개인사를 적으면서, 우리나라의 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모습, 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추적해보려 한다.)
나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깨었다. 수학여행 오늘은. 내게 무언가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희망이 너무나 크다고나 할가. 바라는 게 너무 많다고나 할까?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변화는?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는 그 두려움, 그것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한다면, 현재의 마음을 과거에 투사하는 것이 되겠지. 이 당시 공부가 잘 되지 않아서 고민이 심했던 걸 생각하면 표면적으로는 공부가 좀 잘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엄마는 김밥을 싸고 있었다. 그 옆에서 김밥을 좀 먹다가 세수를 하고 짐을 챙겼다. 책은 1권. 팝송 책인데 요번 수학여행에서 나는 아이들이 부르는 대중가요를 듣고 다시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았다. 순간적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학교에 늦을까봐 걱정이 약간되었다. 차가 안와 안절부절[못]하면서. 걸어갈까 하다가 35번이 오기에 그걸 타버렸다. 그걸 타면 약간 걸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 35번은 공사 중인 길 때문에 우리학교 옆을 지나가기 때문에 탔는데. 바로 뒤에 75번이 오는 게 아닌가? 기분이 나빴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될 텐데.
그러나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알아야 했는데. 버스를 내리자 1학년 때 우리 반 아이 박추곤. 이름을 풀이하면 (내가 붙인 거지만) 가을에 곤한 사람이다. 그리고 17번.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얼굴이 넓적하고 마음 좋게 생긴 아이. (2학년) 난 이 아이에게 중대한 실수를 했다. (뒤에 실수한 내용이 나옴. 신발 착각) [17번은 누구일까? 그리고 나는 무슨 ‘중대한 실수’를 했을까? 연상되는 사건은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이창조라는 아이를 버스에서 만났을 때 나는 김찬표인지로 잘못 부른 일이다. 확인을 해보아야 알겠지만 그런데 이창조는 계성고등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 안에 들어서니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참 정용이가 부탁한 (우리 반 실장) 주우스. 사실 난 엄마에게 말을 꺼내기가 미안했고, 내 돈이 아까왔다. 난 너무 돈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제일 앞에 줄을 섰다가 차는 제일 뒤에 탔다. (뒷칸) 여러 명 안는 곳 중에서 창가에 자릴 잡았다. 실장이 주우스 살 돈을 받으러 왔다. 돈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주우스 값은 3천 원 정도 밖에 안 됐는데. 그것도 못 내서 미안했다. 난 두려움 때문에.
7:00가 조금 넘으니까 차가 출발했다. 한 사람도 낙오자는 없었다. 학교를 나서자말자, 백대원(오락부장)이 나서서 떠들기 시작했다. 별로 따라주는 아이는 많은 것 같지 않았다. 난 바깥 경치를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었다. 단체생활에서 지도자를 따르는 게 임문데. 차는 동촌(금호강)을 지나고 있었다. 3학년 때인가. 벌써 기억이 아련한 데 여기 소풍 왔을 때 고기를 잡았던 일이 기억난다. 고기는 잘 잡혔다. (피라미가 조그만 웅덩이에 놀고 있었던 것뿐이지만.) 나는 거머리를 무척 싫어하고 겁이 난다. 생각만 해도 떨리고 그 다음으로 뱀. 뱀과 거머리 생각 때문에 산에 올라가거나 물에 들어가도 겁이 난다. 옛날에는 벌도 굉장히 겁이 나던데. 이제는 덜한 것 같다.
경산을 지날 때 쯤, 한 사람 씩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코너가 있었는데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못 나가고 말았다. 내 친구 대운이(내 짝. 1학년 때 같은 반)는 나가서 “내 주님, 보호하산가”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곧 나에게도 부를 기회가 왔다. 난 부를 노래는 별로 없었다.
종광(농구)이와 태홍(3학년. 악대부)가 노래를 불렀는데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겠다. 그 다음 경제(2학년 중)가 “꿈을 먹는 젊은이”를 불렀고, 그 다음에는 내 차례인데, 난 등대지기를 불렀다. 수학여행에 이런 노래라니. 하지만 끝까지 아는 노래가 별로 없었고. 어딜 가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이 노래다. 중1. 음악경연대회에서 자유곡으로 이 곡을 불러서 당당 1위를 하였다. 그때는 정말 기뻤다. [반 대항전에서 1등 한 것이었음. 음치 수준인 내가 개인 대회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평사 휴게소란 곳에 내리자, 아이들이 수 없이 변소에 갔다. 밀리고 당기고 변소는 초만원이다. 질서를 지킨다는 건 아무래도 좀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오줌을 누는 데는 차례를 지킨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용을 한다면 깨끗하다는 것은 좀 생각하기 어려운 것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영천을 지나 경주에 닿았다.
보문 호를 지날 때, 안내양의 설명이 있었다. 나는 보문호를 보고,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길이가 1km도 넘는 것 같았다. 내가 본 호수 중에 가장 큰 것 같다. 국민학교, 중학교 수학여행 때도 여기 경주에 왔는데. 보문호를 본 기억이 안 난다. (박물관 - 화엄 - 보문단지)
포항을 지날 때 포항 제철이 보였고, 난 이모 생각이 났다. 이모부는 포항제철에 근무하신다. 지난겨울에 놀러왔던 기억이 난다. 집으로 돌아올 때 시내버스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했던 일.
차내에서는 여전히 백대원 씨께서 떠들고 있었다. 난 차창 밖을 내다본다. 갑자기 차가 멎고 보이는 것은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바다다. 바다를 본 순간 내 가슴엔 피가 끓어 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바다다. 난 이제 바다만 보며 가려고 마음먹었다. 내려서 사진을 한두 장 찍었다. 이제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 오는 신천지가 아닌가? 나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그리고 차에 올랐는데, 종아, 기현, 성민이가 짤이를 하면서 남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난 비켜달라고 했다. 그러나 비켜주지 않는다. 속이 끓었다. 난 분노를 느꼈다. 왜 남의 자리에 앉아서 비켜주지도 않는단 말이냐. 조금 있다가 자리를 빼앗았다.
월송정이란 곳에서 차를 세웠는데 난 그 이유를 모르겠다. 볼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대운이가 오줌이 마렵다고 해서 ‘쉬’하고 내려오는 데 E.T. (이철민: 혹성 탈출)가 사진을 찍고 있어서, 내보고 오라고 했다. 그런데, 윤화, 4번(?), 왕근이도 와서 같이 찍었다. 찍은 것은 쥐포였다. [지창우가 사진을 찍었나?] 얼굴이 무직시리 못 생긴 철민이. 내하고 못 생긴 것을 다퉜다. 사실 난 못 생긴 데도 없는데. 왜 그러는지. 난 노천명 씨의 얼굴이란 수필이 생각났다. 나는 1학년 때 철민이를 참 좋아했다. 어릴 땐 싫어한 적도 있었지만.
차는 계속해서 달려 드디어 강원도 땅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 직전 8차선 정도 되는 비상 비행 활주로가 있었다. 동해휴게소란 곳이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선에 있었다. 강원도는 나곡리란 마을이었고 경상도는 보지 못했다.
차 안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내려가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내려와서 먹을 곳을 찾다가, 멀리까지 가서 먹었다.
차에 다시 오르니, 차는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삼척에서는 무슨 일인지 차가 갑자기 서고, 경찰이 와서 무슨 말이 있었다. 잠시 뒤 차는 다시 출발하고, 죽서루 견학은 안 하는 것 같았다.
삼척을 지날 때 난 대운이에게 물었다. (이때 난 동해가 삼척보다 밑에 있는 줄 알았는데) 동해는 언제 지나왔느냐니까, [대운이는] 동해휴게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동해 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참 깨끗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 [동해는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80년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통합되어 신설된 시이다. 난 이 사실을 나중에서야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다. 한 십 년 전쯤인가? 옛 묵호 항에 들러 구시가지를 본 기억이 난다. 여행 경비가 떨어져 우리은행을 찾으러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4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기억이 흐릿하다. 강릉시를 지나면서, 난 여행오는 곳이 북쪽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약간 무뚝뚝한 게 아닌가 한가? [하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 (기차) 여행 때는 손 흔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여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경포대에는 이율곡의 어머니이신, 신사임당의 동상이 있었다. 거기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보기 싫은 아이가 찍고 있었다. [이 보기 싫은 아이는 누구일까? 이경호? 일까? 아니면 박병우일까?] 난 피해버렸다. 다시 버스에 오르니, 또 종아, 성민, 기현이가 앉아있는 게 아닌가? 이번에는 낙산사에 갈 때 까지만 앉아 있겠다고 했다. (5분 만에 간다고 했다.) 이때, 난 인섭이 옆에 앉았는데, 인섭이는 이때도 돈을 많이 잃은 것 같았다. 또 안내양은 경포대에서 그곳에 있는 호수에 대해 말해 주었다. 옛날부터 다 알고 있는 논이 호수로 변했고, 뒤를 돌아보지마라는 약속을 어겨 돌이 된 이야기. [인터넷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퍼온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 호수는 옛날에 부유한 백성이 살던 곳이라 한다. 하루는 중이 쌀을 구걸하러 왔는데 그 백성이 똥을 퍼주었더니 살던 곳이 갑자기 빠져 내려서 호수로 되고 쌓여 있던 곡식은 모두 자잘한 조개로 화하였다고 한다. 매년 흉년이 되면 조개가 많이 나고 풍년이 되면 적게 나는데 맛이 달고 향긋하여 요기할만하며 지방사람들은 積穀조개라 부른다.<李重煥 《擇里誌》> (1714)
옛 노인이 전하는 말에 명주부가 옛날에는 경포 수중에 있었다 한다. 한 노파가 여자아이를 데리고 살았는데 하루는 노승이 문 앞에 와서 시주를 하고자 하니 그 여자아이가 욕설을 퍼부으며 삼태기에 인분을 담아 중의 바랑에 던지니 중이 그것을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노파가 죄악이 미칠까 두려워하며 북문 밖에까지 쫓아가니 중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의 집이 물에 잠기어 곧 수재를 당할 것이니 속히 달아나라"고 말하고 문득 중은 보이지 않았다. 그 날 저녁 과연 중이 말한 대로 집이 물에 잠기니 여자아이에게 알릴 겨를도 없이 성밖으로 달아났다. 명주 일부가 모두 물에 잠기어 호수가 되고 사람과 가축이 모두 물 속에 가라앉았다. 노파가 그 딸을 생각하고 서서 울부짖다가 돌로 변하니 지금도 경포호수 가운데서 종종 기와조각과 자갈이 보이며 자세히 살펴보면 큰길과 작은 도로가 종횡으로 나 있는 것을 분별할 수 있다. 노파가 돌로 변한 것이 호수 가에 서 있으나 전하는 말이 생긴 지가 오랠 뿐 아니라 황당한 것 같아 고사에는 등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헌에서는 오죽헌이라고 부르는 까닭, 즉 검은 대나무가 많다는 이유로 그렇다는 것이었고, 묵념까지 올렸다. [오죽헌(烏竹軒)은 보물 제165호로, 강원도 강릉에 있는 율곡 이이 (栗谷 李珥)의 생가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양반집 모습을 보존한 희귀한 예로서 주심포(柱心包) 계통의 청순하고 소박한 팔작집이다. 평면구조는 왼쪽으로 향한 2칸이 대청이고 오른쪽 1칸이 온돌방으로 되었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昌枋)만이 돌려지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놓고 초공(初工) 하나로 장설(長舌)과 주심(柱心)도리를 받도록 했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華盤)이 한 개 있을 뿐이다. 추녀도 너무 들리지 않고 원만하다. 뒤뜰에 오죽이 자라고 있어서 오죽헌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죽서루(竹西樓)는 강원도 삼척시에 위치한 누각으로 보물 213호로 지정되었으며, 관동팔경 중의 하나이다. 다른 관동팔경의 누, 정이 바다를 끼고 있는 것과는 달리 죽서루만이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다. 죽서루의 건립 시기는 미상이나, 여러 역사적 기록을 통해 볼 때 고려대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석 위에 길이가 서로 다른 17개의 기둥을 세워 지은 정자로 관동팔경의 정자 중 가장 크다.]
그 때, 누군가가 헛소리를 해서 일순 소란해졌다. 난 낯이 뜨거웠다. 난 너무 늙었다. 나이도 어린데 여기서 나의 힘을 못 믿고 빌었다. 남에게 의존하려는 생각이 너무나 많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오죽헌에서의 전설이야기를 또 하나 들었다.
어느 날 하루는 신사임당이 율곡을 데리고 있는데, 이 아이가 세 살이 되면 호랑이에게 변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이). 그래서 신사임당은 달려가서 그 노승에게 어떡하면, 그 변을 막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는데 그 때 스님이 뒷단에 밤나무를 100그루 심어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곡이 세 살 되든 해 어느 날, 괴승이 찾아와 시주를 요구하더니, 갑자기 큰 호랑이로 변하면서 율곡을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놀란 신사임당이 “내 밤나무 100 그루를 심어 길렀거늘, 어찌 이러느냐?” 하고 말했는데, 그 때 호랑이가 그러면 가보자 하고 뒷산에 올라갔는데, 헤아려보니 99그루밖에 안 되고, 하나는 말라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가 “율곡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칠 때, 갑자기 “나도 밤나무”요 하고 나서는 나무가 있었으니, 그래서 나도 밤나무가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보통은 ‘너도 밤나무’라는 게 있고, 밤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고 하니 내 생각으로는 도토리 나무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도밤나무도 있고 너도밤나무도 있다. 밤나무와는 좀 다른 것들이다.]
벚꽃과 매화꽃은 같은가? [갑자기 이 말을 왜 적었는지 알 수가 없으나, 사실 벚꽃과 매화꽃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 아파트에도 많은 벚꽃나무 사이에 매화나무--살구나무인지도 모르겠다--가 한 그루 있는데 꽃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3.8선(옛)에 내리니 바다 경치가 멋있었다. 바다를 보면서 (당키(당나귀), 돌꽃, 석화 [이것은 모두 한석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E.T. 은찬) 사진을 찍었다. [우리 학년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던 아이 중 한 명이었던 박은찬은 서울대 의대를 갔는데, 대장암인가 무슨 암으로 투병을 하다가 결국엔 죽었다. 십 몇 년 전의 일인 것 같은데. 그 다음에 자다가 심근경색으로 죽은 권기택. 기택이 이야기는 글로 한 번 써볼 수도 있으리라.]
차에 올랐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까전에 말한 5분을 훨씬 넘어 20분쯤 달린 것 같았다. 난 여정표를 빌려 보았는데, 낙산사는 14일 예정이 아닌가? (난, 이때 무척 놀랐다.)
그래서 비켜 달라고 했다. 막 시비가 붙었다가 결국 또 자리를 빼앗았다. 그런데, 난 종아란 놈이 싫었다. 무척.
하지만, 정말로 가는 곳은 낙산사였다.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여정표를 그대로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다. 아이들도 알고 말했을 것이 아닌가? 변경이나, 예외는 항상 있는 것이었다.
낙산사에서는 정말로 사진 찍을 것이 많았다. 혜공스님을 보는 순간 난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해를 받으며 서있는 그 모습이란 정말로 멋있었다. [해수관음상을 왜 혜공스님이라고 썼는지 어이가 없다. 3월 21일에 나는 이곳을 다시 들렀다. 세월의 무게 탓일까? 관음상의 그 눈부시던 흰 빛깔에 녹이 많이 앉은 그런 느낌이었고, 무엇보다 그 곳에 앉아서 책을 보던 여인, 두터운 파카를 입고 홀로 책을 보던 여인이 기억에 남는다. 흐릿하긴 하지만 95년도 12월에 학원에서 잘리고 아픈 마음을 달래려 이곳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벼랑 가까운 곳에 앉아서 먼 바다를 보며 시를 한 편 쓰고 싶었었는데, 초라한 언어였던가?
낙산사 성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이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이다. 그래서 굳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동해에 왔다가 낙산사를 찾는 여행객들이 면 빠짐없이 들러 참배하는 것이 하나의 정해진 코스가 되어 있을 정도다.
1972년 처음 착공되어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했다. 크기는 높이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이며, 대좌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했다.
관음상은 대좌 위에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는데, 왼손으로 감로수병(甘露水甁)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슴께에서 들어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이 해수관음상은 우리 나라에서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손꼽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약 700여 톤을 운반해와 조성한 것이다.
해수관음상 앞에는 기도처인 관음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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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산스크리트어: अवलोकितेश्वर avalokiteśvara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는 지배자’)은 불교의 보살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보살 중 하나로, 석가모니의 입적 이후 미륵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지켜주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이다. 영어 표기는 산스크리트어 발음을 그대로 쓴 것이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 관세자재보살(觀世自在菩薩), 관세음자재보살(觀世音自在菩薩), 또는 줄여서 관음보살이나 관음(觀音) 등으로도 불린다. 중국에서는 남해관음(南海觀音), 남해고불(南海古佛)이라고도 불린다. 티베트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보고 받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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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
보살(菩薩, 산스크리트어: बोधिसत्त्व bodhisattva 보디사트바, 팔리어: बोधिसत्त bodhisatta 보디삿따)은 부처(깨달은 사람 또는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초기불교 경전-니까야에서의 정의), 또는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강조되었다. 보리살타 · 보살마하살 · 각유정 등으로도 불린다. 대승불교가 발달하면서 초기불교의 보살의 의미가 변화되었다.
대승불교는 원래 재가(在家)의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으로, 종래의 부파불교가 출가수행자(出家修行者)의 독점물이었던 것을 널리 전 불교도의 것으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1] 부파불교 시대에서 보살이라 하면 전생시대(前生時代)의 고타마 붓다 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대승불교가 일어난 후로는 모든 사람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불교의 수행자 모두가 부처의 후보자로서 보살이라고 칭해지게 되었다.
이후 불교의 발전에 따라, 고타마 붓다의 경우처럼, 수없이 많은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을 흔히 보살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성문승과 연각승의 이승(二乘: 두 가지 탈것, 두 종류의 가르침)에 대하여 보살승을 포함시켜 삼승(三乘: 세 가지 탈것, 세 종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데, 대승불교 경전인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는 "미세하고 아주 깊고 통달하기 어려워 범부나 이승은 이해할 수 없는 승의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보살이라 하고 있다.]
바다로 내려왔다.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바닷물을 만져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돌 몇 개와 조개, 불가사리 등을 주웠다. (어, 찝찝해.) 이제는 숙소로 향하는 길이다. 중학교 때처럼 밥을 가져다 줄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밥 먹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세수를 했다.
막 나가보니 아이들이 꽉 모여있었다. 밥을 먹으려고 줄을 서니 내 차례는 언젠가 하는 식으로 까맣게 멀었다(너무 길었다). 30분쯤 지나자 내 차례였다. 음식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퍽 적어보이던 밥이 먹으니까 끝이 없었다. 겨우 다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그런데 두 그릇 먹는 놈도 있다니.
잠시 후 방에 왔어는 고돌이를 쳤다.
처음에는 막 잃더니, 잠시 후 3000원을 땄다. 인섭이는 나에게 1000원을 빌려갔다. 정신 없이 잃는 것 같았다. 안 빌려주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돈을 잃으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더니.
그런데, 잠시 후 대원이가 와서 판을 벌여 난 그 뒤로 빠졌다. (30. 임영구, 강영일) 그 뒤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최대열과 강부성은 정신없이 잤다. 실장이 가져온 통닭도 뜯었다.
[4월 13일]
두 시 쯤, 6번 (한 ...)(제주도)[한동균]이 우릴 불렀다. 1번이 배가 아프다고, 우리는 일이서서 1번을 부축하고 선생님을 깨워서 내려왔다. 1번이 막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니 나까지 괴로운 것 같았다. 선생님과 1번(김문환) 군은 (실장도 함께) 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 방에 들어와서 자리에 누우니, 학과가 아이들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담배를 피우고, 화토치고, 했다고 때리는 것 같았다. 3시쯤이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는데 또 실장이 깨웠다. 4시 40분쯤이었다. 앞서 3시쯤, 경제와 난 부성을 깨울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아이들과 짤짤이를 했다. 계속 잃었다. 잘 하면 딴 돈 다 잃게 되었다. 우리는 밥 먹으러 줄서러 오라는 말도 없었는데, 줄을 섰다. 그래도 우리가 일등으로 먹어서 기뻤다. 돌아와서 조금 하다가?
중대한 실수란, 세수하러 갔다 오니 신발 연는[넣는](신주머니) 곳에 17번 신발(자기 말로)이 들어 있었다. 난 내 것이라고 우리고, 내 라고 소리 질렀다. 나중 일은 생각도 않고, 17번은 자기 것이라고 소리쳤다. 결국 난 그게 나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 창피스러웠다. 17번을 어떻게 고개 들고 볼 것인가?
설악산으로 출발했다. 5분 정도 만에 설악산 입구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간 곳은 신흥사. 신흥사에서 산행 안내원의 설명을 들었다. 절의 내력이라든가 그런 것에 관해서. 산을 올라가는 데는 그렇게 힘이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때 들은 이야기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산행 안내원이었는지 누군가가 산에서 갈증을 가시게 하려면 물을 급하게 마시지 말고 천천히 씹듯이 삼키라는 말을 한 것이 내 머릿속에 떠돈다.]
울산바위는 멋있었는데 흔들바위를 보고는 실망이 컸다. [울산바위를 본 기억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졌는데, 이 글을 보니까, 그 당시 이 울산바위를 오르면서 그 거대한 덩치의 울산바위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다만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흔들바위 근처 암자에서 인섭이에게서 빌린 사진기--인섭이는 짤짤이를 하느라 등산도 하지 않았는데--로 울산바위를 찍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울산바위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2009년도 11월 경에 나는 이 울산바위를 처음으로 올랐다. 울산바위 바로 밑부분은 가파른 계단이 내 지친 다리를 더욱 팍팍하게 했다(이날 나는 토왕성 폭포에 올랐다가 내친걸음에 울산바위까지 오른 것이라 더욱 힘든 산행이었다).]
[울산바위 전설
●금강산으로 가던 울산 바위
외설악 신흥사 앞에서 서북계곡으로 따라 올라가 내원암을 지나 산마루에 올라서면 엄청난 암산이 가로막고 있다. 이 산이 바로 울산바위이다.
조물주가 강원도 땅에다 천하의 명산 하나를 만들되 산봉의 수를 꼭 1만2천으로 할 계획을 세우고 각 지방의 산봉 중에서 준초하기로나 웅대하기로나 남의 눈을 끌만한 산에게 영을 내려 모월모일 모시를 기한으로 금강산쪽으로 오면 심사하여 합격한 산에 대하여는 용모에 알맞은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이에 전국 각처의 수많은 산들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모두 모여 들었다.
이때 경상도 울산(蔚山) 땅에 둘레가 10리나 되며 웅장한 바위인 '울산바위'도 금강산으로 떠나왔다. 그러나 태백산령을 걸어오는데 워낙 몸집이 육중해 빨리 걸을 수 없어 온힘을 다해 걸었으나 설악산 지금의 울산바위 있는 근처까지 와 기진맥진해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쉰 뒤에 다음날 다시 육중한 몸을 끌며, 금강산에 가서 조물주를 만나기로 했다.
다음날 울산바위가 금강산 어귀에 들어섰으나 이미 1만2천봉이 다 찼기 때문에 자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 주위의 웃음거리가 될 것으로 생각한 바위는 어젯밤 쉬던 곳을 생각했다. 어차피 금강산에서 단역을 하느니, 외설악에서 주역 노릇을 하자는 생각으로 울산바위는 현재 외설악 중턱에 자리잡았다.
이 전설과는 달리 울산(鬱山)바위의 울(鬱)은 울타리를 뜻하는 말로 울산(蔚山)의 울(蔚)자와는 완전히 글자가 다르다. 다만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울산에서 왔기에 울산바위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울산바위는 울타리처럼 생겼다는 의미에서 울산바위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현실성 있다.
●동자승의 재치가 빛나는 울산바위 전설
울산바위가 울산에서 왔다는 전설이 있자 조선왕조 때 한참 유생들의 기세가 등등하던 어느 때 울산부사가 설악산에 탐승을 왔다가 이곳에서 울산바위의 전설을 듣고 승려들을 골탕먹여 치부(致富)해 볼 꾀를 냈다. 부사는 신흥사에 들러 주지를 불러 "너는 어찌하여 내 고을에 있던 울산바위가 너의 사찰림에 와 있는데도 지세(地稅)를 이제까지 물지 않느냐? 몇해를 기다려도 지세를 가지고 오는 낌새가 없기에 오늘은 직접 지세를 받으러 왔다"고 호통을 쳤다.
이에 유생들 횡포에 기가 죽어 있던 신흥사 주지는 그해부터 울산부사에게 울산바위의 지세를 물기로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말았다. 그해부터 막대한 지세를 물다보니 신흥사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으며, 주지승의 근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주지는 막대한 지세에 근심만 늘어나는데, 어느날 주지승의 근심을 곁에서 지켜본 동자승이 "앞으로 울산에서 울산바위 지세를 받으러 오거든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라고 자신했다. 얼마 뒤 울산에서 사람이 오자 동자승은 "지금까지 억울한 지세를 물어왔으나 이미 문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금년부터는 물어줄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동자승은 "울산바위에는 나무 한그루 풀한포기 나지 않아 우리에게는 큰 손해일뿐이니 울산바위를 도로 울산으로 옮겨 가든지 하라"고 말했다. 울산서 온 사람도 도리가 궁해 "네말대로 울산바위를 울산으로 옮겨 가겠는데, 타고 남은 재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묶어주면 바위를 옮기겠다"고 요구했다.
이에 동자승은 마을사람들과 절간 승려들을 동원해 며칠동안 새끼를 꼬게 해 울산바위를 칭칭감았다. 그리고 광솔에 불을 붙여 새끼를 다 태워버리니 울산바위는 재로된 새끼로 얽혀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울산사람에게 약속대로 했으니 바위를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자 울산사람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흔들바위]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방면의 설악산에 있는 바위.
설악산 소공원에서 울산바위로 향하는 도중에 있는 바위이다. 신라의 고승 의상·원효가 수도했다는 계조암(繼祖庵) 앞에 소가 누운 모양을 한 넓고 평평한 와우암(臥牛岩) 또는 100여 명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 하여 식당암(食堂岩)이라 불리는 반석이 있고, 그 위에 흔들바위가 놓여 있다. 흔들바위라는 명칭은 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지만 100명이 밀어도 한 사람이 민 것과 같이 흔들릴 뿐이라 하여 붙여졌으며, 와우암의 머리 부분에 있다 하여 우각석(牛角石) 또는 쇠바위라고도 한다. 원래는 쇠뿔처럼 2개의 바위가 있었으나 불가(佛家)의 영기가 왕성함을 시기한 풍수지리가가 1개를 굴러 떨어뜨렸다는 말이 전한다.
흔들바위 전설
옛날 이 마을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지만 마음이 착한 오누이가 오붓하게 살고 있었다
오빠는 어찌나 힘이 센지 이 마을 사람은 물론 인근 마을사람들 까지도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성이 양씨인 이들 오누이는 어느듯 세월이 흘러 두 오누이는 장가들고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동생 양처녀도 얌전하고 천사같이 예쁘었다.
오빠는 동생을 좋은 집에 시집보내는 일이 걱정 이였고 동생은 오빠가 빨리 색싯감 고르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느날 아랫마을 부잣집에서 양처녀에게 청혼이 들어와 쾌히 승낙하고 이듬해 봄에 성혼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빠는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한푼이라도 더 많이 벌어서 동생의 혼수마련을 많이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동생이 시집 가는 길엔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동생이 건너가기 편하도록 큰 돌멩이를 들어다 징검다리를 놓았다
그런데 그해 나라에 큰 전쟁이 일어나 모든 장정들이 전쟁터에 뽑혀갔고 양총각도 다른 장정들과 전쟁터에 갔다
동생 결혼식을 몇 달 앞두고 전쟁터에 나가는 오빠의 마음은 찢어 질 듯 아팠다.
오빠는 결혼식 전에는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누이동생과 헤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3월이면 돌아오겠다 던
오빠는 2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고, 아랫마을 총각은 혼례를 올리자고 하지만 양처녀는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는
식을 올릴 수가 없다고 거절하면서 날마다 매봉에 올라 높은 바위에 앉아 오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랫마을 총각은 기다리다 못해 다른 집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말았다.
그렇게 1년이 또 지난 어느 날 매봉바위 위에 올라앉아 오빠를 기다리던 양처녀는 그대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
며칠 후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오빠는 장수가 되어 돌아 왔으나 몽매에 잊지 못한 누이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사람들로부터 누이의 소식을 전해들은 오빠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슬픔에 빠졌다.
가엾은 동생의 한을 어떻게 풀어줄 것인가를.. 몇 날 며칠 동안을 식음도 전패 한 채 바위를 치며 슬퍼하였다.
이때 양장사가 바위를 내리쳐 큰 바위가 두동강이 났으며 그 뒤로 이 바위는 바람만 불어도 흔들흔들 거렸다.
오빠는 죽은 여동생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흔들바위 옆에 큰 바위를 들어다가 놓고
그 위에 사모관대 모양의 바위를 얹어 신랑과 같이 만들어 놨다.
후에 마을 사람들이 흔들바위가 굴러 떨어질까 두려워서 장정들을 불러 밀어 드리려 했으나 꼼짝하지 않고
바위를 건드리자 갑자기 매봉위에 검은 먹구름이 몰리고 천둥과 번개를 치며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후로 이 바위를 그대로 두고 흔들바위라고 불러오고 있다.
흔들바위 이야기
(2008년) 강원도 속초경찰서는 7월 3일 오전11시 30분경에 설악산 관광 중에 가이드 홍모씨(36.여행업)의 설명을 듣다가 중요지방문화재 37호 "흔들바위"를 밀어 떨어지게 한 관광객 제럴드씨(42. 미국인)등 일행 11명에 대해 문화재 훼손 혐의와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들은 이날 새벽 5시 일출관광을 마친 뒤 흔들바위 관광을 하면서 "이 바위는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기만 할 뿐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가이드 홍모씨의 말에 따라 평균체중 89Kg의 거구인 11명이
힘껏 밀어낸 끝에 바위를 추락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경찰에서 "가이드의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해 밀어본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며 범행의 고의성을 완강히 부인했다.
주한 미군 근무 경험이 있는 미국 애리조나 출신의 제럴드씨는 역도 코치 등을 하는 애리조나 주립 체육연맹 회원 10명과 함께 지난 주 일주일 관광 예정으로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소식을 전해들은 문화관광부와 강원도청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한편 근처에서 관광 중이던 일부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흔들바위"는 추락시 엄청난 굉음을 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에 거주하는 목격자 김모씨에 따르면 흔들바위가 떨어질 때
이런 굉음이 울려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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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이야"!!!!!!]
모양도 모양이거니와 정말로 들어오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인섭이는 돈을 잃고 해서 신경질이 극에 달한 것 같았다. 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사진을 찍자고 하니까, 찍을 때가 없다고 하고, 사진 찍을 때 다른 아이들이 찍어달라고 해서 신경질을 내는 것이었다.
사진기를 나에게 주면서 마음대로 찍으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난 사진기가 없었던 게 서러웠다. 내려오는 길에 종근이를 만났다. [기억과는 달리 인섭이도 여기를 올라가기는 간 모양이다.] 우리 둘이는 사진을 두세 장 찍었다. 다시 신흥사에 왔다가 여관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조금 쉬었다.
그 다음에 다시 설악산. 나는 내려서 인섭이와 같이 가고 있는데, 인섭이는 나에게 화를 내었다. 그 뒤 민언이를 만났는데, 민언이와 인섭이는 마음이 맞았던 것 같았다. (사실은 민언이가 인섭이에게 돈 10,000원을 빌려줬기 때문이겠지만.) 인섭이는 그 뒤 기분이 약간 풀린 것 같았다. 비선대에 도착하기 전에 멋있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귀면암이었을까?]
비선대는 정말 멋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3개의 봉우리는 나에게 뭔가를 보여주었다. 내가 찍고 싶었는데, 인섭이가 찍었다. [나는 비선대 앞의 장군봉을 비선대로 착각했고, 이 착각은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설악동 소공원에서 천불동 계곡 방면으로 50여분 거리, 40여분을 가면 와선대가 있다. 와선대에서 계류를 따라 약 300m정도 올라가면 비선대에 이른다.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비가 많이 내리면 비선대 반석위로 흘러 몇번이나 꺾이는 폭포를 이룬다.
연속된 바위에 폭포를 이루는 광경은 흡사 우의(羽衣) 자락이 펄럭이는 것 같으며 마고선녀(麻姑仙女)가 이곳에서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하는 전설에 따라 비선대라 하였다. 봄이 오면 산속의 이름모를 꽃들의 향기가 골짜기를 메우고, 여름이면 녹음방초(綠陰芳草)에 신선미를 느낀다.
가을이면 오색 단풍에 물들고,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 설화(雪花)가 꼴짜기를 장식하니 외설악 가운데 으뜸가는 절경이라 할 수 있다. 개화설경(開花雪景)은 유달리 빼어나 금강산의 만폭동을 무색게 하는 설악산의 대표적 명승지이다.
비선대앞에 높이 우뚝 솟아 있는 3각모양의 돌봉우리를 장군봉 또는 미륵봉(彌勒峰)이라 하며 중간 허리에 있는 석굴을 금강굴이라 한다. 깎아지른 듯한 큰 돌산허리에 굴을 팔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금강굴을 자연굴이라 한다. 굴안의 길이 18m의 자연 석굴, . 넓이는 약 7평정도 된다.
일찍이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했었다고 전해온다. 이전에도 불을 땠던 구들의 흔적과 불상 등의 유물이 있었고, 요즘에는 신흥사의 부속 암자로 되어서 새 불상을 모셔 놓았다.]
E. T.가 오더니만 또 한 장 찍었다. 나에겐 그런 용기도 없었는데 정말 낯 뚜꺼운 놈이야. 내려오는 길에 성호, 대운, 경제와 또 한 장 찍었다. 실장(정용)이와 한 번 찍고 싶어서 불렀는데, 찍어 달라고 하는 소리로 잘못 들었는지, 사진을 찍고 말았다. 결국 난 실장과 함께 찍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다음 간 곳은 비룡폭포. 설악산에 와서, 흔들바위를 보고 실망이 컸지만 비선대를 보았을 때 그 기분은 정말.
비룡폭포를 올라갈 때 아이들은 여자 학교 아이들에게 장난을 걸었다. 여자 아이들은 피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대원이는 모자를 빼앗았고, 그 아이는 그냥 가버렸다. 제일 처음 본 폭포는 육담폭포였다. 물이 바위에 부딪혀 튀어오르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 물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비룡폭포는 그렇게 아름답다거나, 그런 것은 못 느꼈다. 하지만 물은 정말 차가웠다. 그리고, 산꼭대기 우리가 올라가지 못하는 곳에는 얼음과 물. 얼은 곳도 있고 물이 떨어지는 곳도 있었는데, 내가 보기엔 모두 얼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곳이 바로 토왕성폭포이다. 토왕성폭포에 대해서 글을 한 번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사진기를 안 가져온 아이들은 불평이 많았다. 하지만 난 자기가 가져오는 것이 최고지 안 가져온 바에야, 별로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려올 때 다시 육담폭포를 보았다. 흔들다리가 있고(폐쇄되었지만) 폭포의 물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면 나는 정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을 수 없었다.
여관에 돌아온 뒤, 저녁을 먹고는 캠프파이어를 한다고 했다. 아이들과 짤짤이를 하는데 영곤이가 왔다. [이 아이는 삼양주유소 옆의 우리 동네에 살았던 것 같은데. 우리 집에서도 세를 들어 살았던가? 그게 아니라면 중학교 동창이었나? 작고 못 생긴 아이. 장난기가 무척이나 많았던. 공부도 무척 못했지.] 왜 그렇게 까부는지. 잠시 후, 영곤이와 장난[몸싸움]을 쳤는데, 레슬링부여서 그런지 도저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힘이 좋은 내가, 목조르기로 잡았지만. 나는 피곤해서 누웠다가, 잠이 들었는데, 잠시 후에 깨었다.
아이들은 판을 벌리고 있었다. 짤짤이를 했는데 자다가 일어나서 해서 그런지 금방 1000원 정도 잃었다.
밖에 나가서 캠프파이어 하는 것을 볼려고 하는데, (꽁치, 담임 1학년)[이] 있어서, 들어오고 말았다. 잠시 후 약간 땄는데, 그 뒤로는 판을 치우고 딴 아이가 사온, 야쿠르트를 마시고 잠이 들었다.
[4월 14일]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를 감았는데,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긴, 산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고 있었는데, 당연한 지도 모른다.
아침은 어제와 똑같이 먹었고, 차에 올랐다. 주인이 나와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실장은 1번이 도저히 아파서 안 되어서 선생님과 같이 갔다고 한다(대구로).
차는 달리기 시작했고, 속초 근처를 지날 때 우리는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게 되었다. [차는 설악동에서 양양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정확히 속초 쪽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얼마쯤 달리자 잠이 오기 시작했다. 난 잠이 참고, 가만히 아이들을 보니 자는 아이가 많았다. 난 다가가서, 얼굴에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런데, 내가 잠들고 난 뒤 내가 당하고 말았다.
약간 잠결이었는데, 누군가 내 얼굴에 그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게 무엇인지 잘 몰랐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눈을 떠보니 대운이가 내 얼굴에 그리고 있었다. 난 우스웠다. 내가 당하다니. 잠시 후 양양에 다았다. 양양에 닿기 전에 차가 섰는데, 그 때 대원이가 내리더니, 돌아오지 않았는데 차가 떠니기 시작했다. 나는 속이 뜨끔했다. 그런데, 차는 가는 것이 아니고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었다. 한계령에 다다르자, 경치를 보기에 바빴다. 이슬비가 내리고. 안개가 끼어서, 잘 볼수가 없어서 좀 보기가 안 좋았지만, 그래도 내설악의 경치는 아름다웠다.
오색약수터를 지나고, 장수대를 지날 즈음 천마대(?)란 곳을 보니 절벽이 높다랗고 넓게 퍼져 있었다. [여기도 혼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설악산에 천마대라는 곳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장수대 인근 대승폭포까지 이어지는 신선벽 등의 암벽을 보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장수대가 어느 곳인지 계속 궁금했는데, 장수대는 산장 이름인 것으로 판명이 났다. 대승폭포도 몇 번을 올랐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안산을 한 번 올라가보고 싶다.]
[장수대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방면의 설악산에 있는 산장.
내설악 지구의 한계리에서 옥녀탕과 하늘벽을 지나 대승령(大勝嶺) 등산로의 기점 부근에 있다. 장수대라는 명칭은 1959년 인제군에 주둔한 국군 제3군단 군단장이 6·25전쟁 중 설악산전투에서 산화한 장병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산장을 세운 뒤 명명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설악산국립공원 장수대분소가 설치된 곳으로, 국도 44번과 연결된다. 장수대에서 한국 3대 폭포의 하나인 대승폭포까지는 900m 거리에 약 40분이 소요된다.]
오늘은, 별로 구경도 못하고 차 안에서만 놀았고, 속리산을 향해 차를 달렸다. 원주를 지날 즈음 안내양 누나가 이야기를 한 가지 해주었다. 누구나 다 아는 좀 시시한 이야기였다고나 할까?
칠칠이와 팔팔이 이야기였다.
칠칠이와 팔팔이는 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하루는 칠칠이가 팔팔이를 찾다가 보물을 발견하고는, 그냥 가져가면 팔팔이에게 빼앗길까봐 이렇게 팻말을 박아 놓고는 거기에 묻었다.
“여기 보물 없음, 칠칠이.”
팔팔이도 칠칠이를 찾아 나왔다가 이 팻말을 보게 되었다. 팔팔는 궁금이 여기 보물 있는 곳을 파보고는 보물을 훔쳐가지고, 그냥 가져갔다가는 안 될 것 같아서, 팔팔이도 팻말을 썼다.
“난 보물 못 봤음, 팔팔이.”
그 뒤 칠칠이가 보물 있는 곳으로 와서는 이 팻말을 보았고, 땅을 파보니 보물이 없으니까 화가 억수로 나서 마을로 돌아와서 소리쳤다.
“팔팔이 빼놓고, 다 나와.”
치악산의 전설을 지날 때 치악산에 가봤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대원이가 앞에 나가서 떠들다가, 반응이 없자, 좀 저속한 노래를 불렀는데, 교감을 고함을 질렀다.
그 뒤 안내양이 아파서인지, 교감이 설명을 했다.
[치악산 전설]
http://blog.naver.com/ansdid6/10098795327
http://blog.naver.com/whwls9639/180487357
여주 다와 갈 즈음에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세종대왕, 효종, 세종대왕의 왕비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문을 들어서자, 난 세종대왕님의 업적을 생각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넓게 펼쳐져 있는 잔디밭은 야구를 해도 될 만큼 넓었다.
옛날의 순장 제도. 교감 선생님께서 순장을 하는 대신에 짐승을 잡아서 묻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뜻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그 뒤 충렬사란 곳을 지났는데 난 충렬사가 이순신 장군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순신 장군은 현충사가 아닌가.
나는 나중에야 충렬사란 뜻을 알게 되었지만 어느 분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뒤는 잠이 들었는지 잘 모르겠고, 문경세제[재]에 닫[닿]기 전에, 수안보 온천과, 조령(이화령)을 넘어 문경세제에 내렸다. [보충 : 충렬사가 이순신 장군과도 관련이 있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는 통영에 있었고,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임경업 장군을 모신 충주의 충렬사가 아닌가 한다. 임경업은 친명파로 역적으로 몰려 장살당했다.]
교감 선생님께서는 이 문경세제에서 왜 신립장군이 패하고, 배수진을 쳤는지는 모를 일이라고 하셨다. (비록, 여기서 패해서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난 그 때 내 친구 영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경제에게 해주었다.
권율 장군에게는 두 사위가 있었다. 하나는 이항복이고, 하나는 신립이 아닌가? 이항복으로 말하면 괴짜이고, 사람이 능글맞다고나 할까. 모든 일에 편하고 낙천주의적이라고 할 것 같으면, 신립은 조금이라도 나쁜 일이이라도 있으면 못참고, 타협을 모르는 외곩수적인 사람이다.
이항복은 자기가 감찰을 나갔다가, 술집 주모가 하룻밤 같이 자기를 청했는데, 그 여자는 보기 드문 추녀였다. 그러나, 이항복은 기꺼이 받아들였는데, 신립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권율이 자기 이야기를 들으면, 이항복을 나무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가 사냥을 하러 갔을 때, 혼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절세가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여자가 하룻밤 같이 자기를 청했는데도 뿌리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권율은 아무 말도 없었다.
(권율의 딸은 하나였다고 하는데, 이항복이 이 집 사위였고, 신립도 이 집과 관련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항복:오성, 이덕형:한음)
본론으로 들어가면, 신립에 대한 이야기지만, 시작하겠다.
어느날, 하루는 신립이 사냥을 갔는데, 그만 부하들과 헤어져서 길을 잃고 말았다. 컴컴한 길을 가다 보니, 산중에 불이 반짝 집이 한 채 있었다.
주인이 나오는데 보니, 절세미인이었다.
하룻밤 묵기를 청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그러나, 안돼는 이유를 캐어물으니, 오늘밤, 우리 부모님을 모두 죽인 산적이, 자기를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신립은 검술에 뛰어난 장수인지라, 염려 놓으라고, 말하고 산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뛰어들어오는 산적을 보니 키는 장승만큼이나 컸고, 얼굴도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단 한 화살로 정통으로 가습을 꿰뚫어 그 산적은 일순에 죽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신립을[이] 집을 나서려는데, 그 여자가, 종이라도 좋으니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립은 뿌리치고 나오는데, 그녀는 정이 그러면 나는 죽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신립이 그대로 나오다가 뒤돌아 보니, 그녀가 지붕위에 올라가, 신립을 부르더니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 여자는 숨이 끊어진 뒤였다. 무덤을 만들어 묻어준 뒤, 돌아서 산을 나왔는데, 이야기는 그 뒤가 중요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은 문경세제를 지키게 되었는데, 일본군은 이곳을 지날 때, 자기의 병사 반이 죽을 각오로 온 것이다.
드디어, 일본군의 공격이 있기 전날 밤. 신립은 꿈을 꾸었다. 자기가 구해줬다가, 죽은 그 여인이 나타나, 내일 싸움에 이길려면 저 뒤에 있는 강에 가서 배수진을 치라는 것이다. 신립의 그 여인이 자기에게, 입은 은혜를 갚으려나보다 하고, 부하 장수들을 모아 배수진을 치라고 했다. 그러나, 모두 반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지만
신립은 기어코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인가? 모두 일본군의 조총 앞에 쓰러지고, 신립 자신도 죽고 말았다.
여자의 한이 이토록 무서운가? 이 전설은 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를 구해줬고, 자기 스스로 죽은 처지에, 그렇게까지 복수할 것은 무언가?
그러면, 이쯤에서 이야기는 접고 또 차는 달린다. 이제는 속리산까지 2~3시간 동안 계속 달릴 것이다.
대원이가 나와서 떠들어 댔다. 2시간 반 동안 계속 쉬지 않고 노래 부르고 떠들었다. 여행이란 이런 맛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조용하고, 쓸쓸한 그런 여행.
드디어 속리산에 도착. 여기는, 설악산보다 더 지독하게 구속이 심했다. 식사할 때도 반 따라 먹었는데 우리는 2반이므로 2번째로 먹게 되었다. 앉는 것도 먹는 순서대로였다.
밥을 먹고 난뒤 백대원이 설치기 시작했다. 500원 씩 거둬서 먹을 걸 사온다더니만, 내가 먹은 것은 콜라 약간이었다. 뒤에 우리반(30. 영일. 24. 26. 25. 상돈(31))은 돈을 내서 먹을 걸 샀는데 푸짐했다. =>여기서 사건이 있었다. [무슨 사건일까? 이어지는 이야기인가?]
(비가 와서 캠프파이어를 못한다고 하니까 저희들끼리 설치다가, 술을 먹은 아이들은 취해서 정신없이 놀았다. 나는 밖에 갔다가 대원이와 권대가 춤추는 걸 보았다. 웃통 벗고 대운[원]이가 설치다가 학과에게 걸렸다. 내 옷을 입고 갔는데, 1500원을 잃어 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아깝다.
아, 난 어떡하면 좋아. 내 좋은 사진. [아마도 이 사진은 브룩 쉴즈의 사진이었을 것이다. 대학교에 들어올 때까지 나의 우상이었던 브룩 쉴즈. 브룩 쉴즈에 대해서도 한 번 글을 써볼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우리는 화토를 시작했는데, 학과가 왔다갔다하는 소리가 들려 누워서, 좀 있다가 하기로 했는데 모두 잠이 들어 버렸다.
참, 이런 일도 있다니.
아침에 일어나서 모두 웃었다.
[4월 15일]
드디어 오늘은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일어나, 2장 접기 하러 갔다. 이게 웬일인가 금방 돈을 잃고 난 아이들에게 돈을 빌리려고 했는데, 잘 안 빌려 주었다. 난 안할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안할 수가 없었다. (잃은 돈을 생각하니)
아침을 먹고 법주사로 올라갔다. 빈지, 진눈깨빈지 내리고 있어서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다.
법주사에서는 사진기가 없는 게 정말 서글펐다. 사진을 찍을려고 하니까 찍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겨우 광수 사진기를 빌려 동진이가 찍어 주었다. [이 두 친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3학년 때 같은 반인 최광수는 아닐 터이고]
E. T.와 꽁치가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내가 조금만 용기가 있었다면 들어가서 같이 찍었을 것을. 우리 선생님과 또 사진을 찍었다.
내려오는 길에 쟁반을 하나 샀다.
인두로 그림을 파서 파는데 참 멋있었다. (안내 양 누나가 사준 맥주도(콜라) 먹었다)
점심을 먹고 마지막으로 2장 집기를 했다. 계속 잃다가 마지막에 좀 땄다. 잠시 후에 차에 올랐다. 부성이는 대열이를 찾으러 갔다.
겨우 뛰어올라온 부성이를 보고 나는 가만히 창밖[창가 자리]에 있었다. 비켜줘야 할 것을.
어제 온 길을 다시 달려 상주에 닿았다. 기현이란 놈이 좀 비켜달라고 있다. 난 뒤에 왔는데. [나보다 뒤에 왔다는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종아, 기현이 이 두 놈은 우리 반에서 마음에 안드는 놈이야.
마지막 집에 간다니까, 아이들은 술을 먹고, 안내양 누나에게 이상한 소리도 했다. 안내양 누나는 자는 아이의 얼굴에 볼펜으로 그렸다.
낙동, 선산을 지났다. 참, 선산군은 우리의 고향이 아닌가. 우리 본은 해평인데. 난 이제까지 선산군이, 합천, 고령 있는 쪽에 있는 걸로만 생각했다. [아버지의 고향이 야로여서 그쪽으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니. 이렇게 어리석은 나.
좀 더 재미있는 일이 많았었는데 난 이것 밖에 적지 못하다니. 팔이 아파오고 있다. 기력이 떨어진다.
칠곡을 지나고 대구 직할시로 들어왔다. 첫 동네는 노원동이였다. 아이들은 또 신나게 떠들어댔다.
마지막 30분이 뭐 어쩌고 하는데 이쪽 길은 내가 와본 곳인데도 어떻게 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옛날 내 그리운 학교 경운 중학교가 보인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석별의 정을 부르고, 교가를 4번인가 5번 부르고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앉았다가 나가면서 나는 안내양 누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다.
내린 후 인섭이에게 사진을 찍자고 했다. 인섭이는 화를 내면서 찍을 것 뭐 있다고 하면서 가버렸다.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쫓기듯 교문을 나섰다.
부성이를 만났다. 아 서글픈 인생이여. 안녕이란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야 하는 그런 슬픈 인생.
나는 처음 오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올 때 나를 약올렸던 75번이었다. 뒤이어 기석이가 탔다. 기석이는 나하고 만나는 수가 빈번하다. 집이 같은 쪽이어서 그랬을까?
수학여행 갔을 때 일어난 이야기를 나에게 이야기 해주었지만 난 흘려버렸다. 먼저 기석이가 내리고 난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집으로 들어가는 발길이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다.
[들뜬 마음으로 출발한 여행이 왜 이렇게 씁쓸하게 끝을 맺게 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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