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기 6 (강촌 나들이)
[구곡폭포를 찾아서]
무슨 말로 허두를 열어야 할까? 베란다 문을 연 순간 주차장에 쌓인 눈이 내 마음을 동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할까? 아니면 하는 일도 없이 피로한 심신이, 그나마 붙들고 있는 책에서 나를 밖으로 몰아내었기 때문이라고 할까? 성북역 바로 옆에 살기 때문에 경춘선 여행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까? 어쨌거나 나는 추운 줄도 모르고 날리는 둥 마는 둥 하는 눈발을 맞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성북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강촌의 구곡폭포.
97년 연천에 있는 ‘재인 폭포’에 마음을 뺀 긴 후로, 나는 폭포를 보러 많이 다녔다. 멀리서보면 까마득한 산꼭대기에서 한 줄기 물이 벼랑을 타고 떨어지는 설악산의 토왕성 폭포며, 남한에서는 그 길이가 제일 길다는 역시 설악산의 대승 폭포(88미터라고 했던가?), 소금강의 구룡폭포, 경기도에서는 신철원의 삼부연 폭포와 한국의 나이아가라라는 터무니 없는 광고로 사람을 현혹하는 한탄강의 직탕 폭포, 감악산의 은계 폭포, 또 고향인 대구 근교에는 팔공산의 팔공 폭포, 안의 근처 용추 계곡의 용추 폭포, 그리고 삼랑진을 지난 곳에 있는 천태산의 이름 없는 폭포, 폭포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나를 매혹시켰다. 폭포는 물론 수량이 많을 때, 그러니까 장마 뒤에 가서 봐야 폭포가 지닌 최대한의 힘을 느끼고, 때로는 그 힘에 위압되기도 하지만(실지로 천태산에 있는 그 폭포는 이름도 없고 물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닌 그런 폭포 였는데도 장마 뒤에 그곳을 찾았을 때에는 그 엄청나게 쏟아지는 힘에 그대로 매혹된 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수량이 작을 때는 작은 대로 또다른 정적인 맛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재인 폭포’는 폭포를 둘러싼 통속적이면서도 슬프기 짝이 없는 전설과 폭포를 둘러싸고 있는 절벽 바위들의 특이한 생김새와 수려한 풍광과, 또 폭포의 물줄기를 아래서부터 위로 따라 올라가면서 보다보면 폭포를 둘러싸고 있는 절벽이 움직이면서 나에게로 기우는 듯한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신비감 때문에, 아니 무엇보다도 어지러웠던 내 마음을 달래줄 위안의 장소로서 자꾸만 찾게 되었다.
장마 뒤의 여름 폭포가 자신이 가진 힘을 최대한으로 쏟아내는 데 반해, 겨울 폭포는 물줄기가 아예 끊기거나 얼어붙고 말기 때문에, 겨울 폭포는 볼 것이 없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다 겨울 산행에는 위험이 따르므로 폭포의 완상은 봄과 여름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십이월 말에 가본 재인 폭포는 반쯤 얼어붙은 채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고, 이주 전인가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본 ‘구곡폭포’는, 그 순백의 빙벽이, 거기에 매달려 빙벽을 오르는 사람의 모습이, 산을 뒤덮은 흰눈과 함께 가슴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겨울이 가기 전에 한 번 가보리라, 라는 생각이 쌓인 눈과 함께 별로 걸리적 거릴 것도 없는 내 발걸음을 재촉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으로는 빙벽이 나에게 시 한 구절이나마 던져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하면서.
성북, 두시 사십 이분 발 통일호의 강촌 도착 예정 시간은 네시 육분인가 그랬다. 경춘선은 대다수의 서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언제나 여행과 낭만, 이런 것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강촌은 87년도에 문창반에서 MT를 간 곳이기도 했다. 대성리, 청평, 남이섬, 강촌, 춘천 MT 장소로 한 번쯤 묵지 않은 곳이 없지만(남이섬은 못가봤군), 이등병 신분으로 따라나섰던, 그리고 부대 복귀 시간 때문에 일찍 나서야 했던 이 강촌 MT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때에도 민박을 하던 곳에서 얼마쯤 떨어진 거리에 폭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96년엔가 차를 구입하고 얼마쯤 지나서 춘천에 갔다가 한밤중에 이곳 강촌에 와서, 구곡폭포까지 플래쉬만 들고 혼자 걸어올라간 기억이 있다. 한밤중에 혼자 올라간 산길이라 무섭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고(올라갈 때 보다 내려올 때가 더 무서웠다. 뭔가 뒤에서 나에게 덤벼들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게 되고.) 폭포에 이르렀는데도 물떨어지는 소리도 시원스럽게 들리지 않고(아마도 갈수기였던 모양이다) 어디가 폭포인지 정확히 분간을 할 수도 없어서 실망감과 무서움만 안고 내려왔었었다. 그 뒤에도 친구와 함께 강촌에 들르긴 했었는데 친구의 반대로 구곡폭포에 오르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 때도 밤이어서 친구가 반대했었다.
네 시가 넘은 시각에 도착한 강촌 역. 안내판을 보니 구곡폭포까지는 3.5km나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까 차를 타고 상당히 들어갔던 것 같았는데, 주변에는 이용할 교통 수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택시도 버스도 없었다. 사람들을 잔뜩 태운 자가용들만 쌩쌩 달리고 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폭포에 도착해야 할 텐데. 뛰어간다고 해도 족히 삼십 분은 넘게 걸릴 거리였다. 일단 구곡폭포로 재게 발걸음을 옮겼다. 연신 지나가는 차들을 보면서. 버스가 한 대 달려와서는 내 옆을 지나가는가 하더니 몇 미터 앞쯤에서 섰다. 나는 재빨리 버스에 올라탔다.
강촌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관광지가 되었지만, 사람들이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기 때문인지, 버스는 적자를 면치 못한다고 운전수 아저씨가 울상이었다.
“하루에 타는 손님들 총 합해 봐야 칠만 원이 채 안 되요. 내 일당도 안 나오는 데 뭘.”
“정부에서 보조가 나오지 않나요.”
“없어요. 그런 것. 지역마다 다른데, 나온다고 해봐야 기름값 정도죠.”
구곡폭포 입구에 도착. 입장료는 천 육백 원. 구곡폭포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십오 분. 내 앞에서는 봉고차 한 대가 업무 때문인지 얼어붙은 산길을 억지로 올라가더니만 기어코 미끌어져 내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꽁꽁 얼어붙은 산길 위에 모래를 뿌려놓은 것, 나는 모래가 깔린 부분을 밟으면서 폭포로 나아갔다. 한 모퉁이를 돌아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보이는 빙벽은 밋밋한 듯 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그런 황홀감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폭포 전체가 내 시야로 들어왔을 때의 그 얼어붙은 웅장함은 나름대로 가슴에 새겨졌다. 하지만 폭포 보다 내 시선을 더 끈 것은 폭포의 중간쯤에서 빙벽을 등반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일에 (1/21) 몸을 연결한 채 손에 든 피켈로 빙벽을 찍고, 아이젠으로 자리를 만들어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사람. 처음에 나는 그 호리호리한 몸매 때문에 여자가 아닌가 했다. 아래에서는 덩치가 빵빵한 사람이 자일을 잡고 길이를 조정하고 있었으며, 그 사람 외에도 같은 팀인 네다섯 명이 한 쪽에 불을 피워 놓고 빙벽을 오르는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런 소득도 없는 무료한 행위.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가 가져다 주는 쾌감과 성취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등산을 하고, 빙벽을 오르고 하는 행위가 며칠 전 집에 갔을 세 살 난 조카가 연신 앞구르기를 하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한 발짝, 한 발짝 달팽이의 움직임보다 더 느린 빙벽 등반, 그래서 보는 나의 목이 다 뻣뻣해졌지만, 조금씩 조금씩 위로 올라간 그 사람은 드디어 폭포 너머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나도 잠시 한 숨을 돌리고 폭포 전체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물이 흘러내리다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상식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빙벽은 그 모양이 성류굴이나 고수 동굴 같은 석회암 동굴의 종유석이 흘러내리다 굳어버린 모양과 흡사했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은 그렇게 굳어지는 모양이었다. 두텁게 얼어붙은 빙벽 안쪽 어디선가에선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아래쪽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있은 다음, ‘하강해도 좋다’는 신호가 떨어졌다. 그러자 위쪽에 있는 사람과 몇 번의 대화가 오간 다음, 폭포 정상에 있던 사람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하강은 올라갈 때와는 반대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발로 몇 번 빙벽을 차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십 초도 안 되 폭포 하단부에 이르렀다. 정상을 밟고 내려온 사람은 ‘재미있다. 하루에 세 번 정도는 거뜬히 오를 수 있겠는걸’이라고 하면서 상당히 흐뭇해 했다. 아무래도 빙벽 등반 경험이 별로 없었던 초심자인 듯 했다. 그 다음 사람이 등반에 나섰는데, 중간에 한 번 피켈로 찍은 곳이 금이 갔는지 쭉 미끄러졌다. ‘아’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매달려 잠시 대롱거리던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등반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중간쯤 오르던 그는 하강하고 말았다.
이 때가 다섯 시 반쯤. 날은 벌써 어둑어둑 해졌고, 등산 양말에다 등산화를 신긴 했지만 발도 시려오기 시작했다. 머리쪽은 등산용 모자 위에다 파카에 달린 모자까지덮어썼기 때문에 괜찮았다. 약간 높은 비탈에서 빙벽 등반을 구경하던 나는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그 사이 젊은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이 폭포를 구경하러 왔다가, 빙벽 등반하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떠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라면 한 명은 좀 외롭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자 중 한 명이 내 곁을 지나 미끄러운 산길을 달려내려갔다. 머리칼이 긴 아가씨.
여섯 시 십분 버스를 타고 강촌 역까지 나와서 여섯 시 오십 육분 기차표를 끊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저녁을 먹고. 역의 이층 대합실에는 강을 주제로 한 시가 여러편 걸려 있었는데, 신경림의 ‘강’은 너무나 암울한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도 있었고, 강촌 역 부근 카페에서 노래를 하는 시인 서춘석의 시도 몇 편 걸려 있었다. 그리고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기 직전 나는 역사 벽 기둥에 걸린 ‘낙서장’에다 아이처럼, 이 쓸쓸하고 차분한 나들이를 기념하기 위해, 몇 자 적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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