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의 우려가 현실로 될 상황에 내가 놓여 있다. 뭐, 꼭 적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는 몇 개의 흐릿한 인상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글로 여행기를 적는다는 것은 사실은 체험을 재창조하는 것이리라. 아름다웠든, 즐거웠든, 고통스러웠든, 쓰라린 것이었든 그 순간들을 글로 한 번 비끌어매 보려는 불가능한 시도이리라.
그렇게 볼 때, 가까이는 지난 겨울의 영국 여행이 있다. 여행을 하는 동안 70페이지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일지를 작성했기 때문에 이 여행은 그래도 언제든지 다시 적어나갈 수 있다. 그렇더라도 글을 쓰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의 행동을 추동하는 가장 큰 요인은 역시나 금전적인 보상이리라.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이 행위를 내가 해나가려 몸부림치는 것은 글쓰기에서 흔히 말하는 자기 만족 내지는 즐거움을 찾으려는 것이고, 또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본다면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가닿는다면 그래서 어떤 공감대가 부지중에 형성이 된다면 하는 것?
우리 세대는 - 아니 적어도 나는 - 글쓰기 교육을 고등학교 때까지는 거의 제대로 받지 못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1학년 정도까지 일기를 써서 검사를 받았던 것이 글쓰기 훈련의 전부라면 전부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 때문인가, 글쓰기가 말하는 것처럼 - 일상적인 말 외에 토론하는 훈련도 학교에서 거의 제대로 받지 못했다 - 인간의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단정지을 수는 없겠으나,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를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말하기와 유사하지만 좀 더 편안한 호흡으로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나, 수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순발력이나 순간적인 재치가 부족한 대신 나름대로 좀 깊이 있게 사유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좋은 표현 수단이다. (글이 뚜렷한 방향 없이 흘러가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지양하지 않고, 이 글을 정말로 붓가는 대로, 그게 아니라면 내가 지난 7년 가까이 받았던 상담의 영향이겠지만, 자유연상을 좇아 써보려 한다.)
요즈음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정말로 하고 싶은 말들, 혹은 정말로 흥미로운 사건들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좀 과장된 비유로 이야기를 하자면 체포되지 않은 살인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무래도 살인 행위였을 터인데, 그것을 고백하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에, 그것을 공론화하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설악산 여행에서도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고 그 중에 많은 부분은 공개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소설가들이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환타지들을 타인의 것인양 전가하는 면이 없지 않다는 요즈음의 생각이 이런 부분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리라. 용기가 있는 작가들은, 이를 테면 악명이 높았던, 헨리 밀러 같은 작가들은 사회가 금기시 하는 것들에 과감히 맞서서 자신을 표현했다. 나에게는 아직 그런 용기가 없다. 하지만 상담실 내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려 한 것처럼, 공론화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다만 나의 일기장에 남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표현 자체를 막아서는 안 되리라.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부분을 공개할 수 있는 용기를 - 어떤 경우에는 사회의 눈을 너무 지나치게 의식해서 위축이 된 경우도 없지는 않으니까 - 또 사회와 불필요한 다툼을 피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많은 체험들이 그 의미가 나에게서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비산되고 말았다. 그 핵심에는 2001년도의 전국일주와, 그 와중에 있었던 지리산 야간 등반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의 공룡 능선 등반은 이 지리산 야간 등반의 대체물이다.) 조만간에 거듭 실패하고 말았던 15년 전의 이 여행기를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이다.
이제 수첩에 적은 짤막한 메모와 사진들을 바탕으로 공룡능선 등반기를 적어 나가보도록 하자. 아무래도 한꺼번에 적어 나갈 수는 없을 듯하기 때문에 시간이 나는 대로 번호를 매기면서 적어나가는 방식을 취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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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쓴 것처럼 '공룡 능선 등반'은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어 온 것이었지만, 실행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한 두어 달 전쯤에 대학원의 여자 후배와 단 둘이 술자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낮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거나하게 취한 우리 두 사람은 둘 다 나름대로 '산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후배가 '산꾼'을 나누는 기준 중의 하나가 '공룡 능선을 탔는가, 아닌가'라는 말을 해 내 야코를 팍 죽였다. 그녀는 소위 전문 산악인들과 한국의 산은 물론 중국의 '황산'까지 섭렵했다는 말 앞에 나는 초라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고 있던 차에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던 친구가 자신의 노무사 동료들과 5월 26일에 공룡 능선을 타기로 했는데, 내가 끼어도 될 듯하다고 했다가, 산장에 자리가 잘 나지 않아서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4월 중순 쯤에 나는 지리산 야간 등반을 다시 한 번 한 뒤, 그 동안 실패만을 거듭했던 그 산행기를 완성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야간 등반에 필요한 헤드 랜턴을 두 개나 구입하고, 화개로 가는 표까지 예매해 두었는데, 갑자기 뜻밖의 일이 생기는 바람에 등반을 취소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출발 2,3일 전쯤에 갑작스럽게 공룡 능선을 한 번 걸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4월은 입산 금지 기간이라, 국립 공원의 직원들에게 걸리면, 과태료를 물어야 할 위험부담도 있고 해서, 입산 금지도 해지된 지금, 편안하게(?) 걸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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