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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이야기/고흐 시편

김승희 -- 귀가 없는 자화상

by 길철현 2022. 3. 5.

나의 방은

하얀 관을 닮은 상자 속처럼

고요하다.

나는 태양에 마취된 채로

주술에 빠진 무당처럼

고요하고도 행복하다.

나는 사랑으로 열정으로

보글보글 끓고 있다.

마치 스스로 전기스위치를 넣은

색채의 남비처럼

색채에 취하여 

난 종이등불처럼 막막히 행복할 수 있다

 

태양 속의 촛불처럼

난 뜨거움을 사랑하지만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소리가 

점점 가까이 더욱 가까이 고막 가까이

다가들면

태양 속의 촛불처럼

난 뜨거움을 사랑하지만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소리가 무서워서 

난 귀를 막고 

침대 밑으로 화병 속으로 구두 속으로

숨어들어야만 한다.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난 침묵을 원해.

조용하기만 하다면

불난 집 문을 꽈꽉 잠가버리고

난 그 집이 불타고 있다는 걸

잊어버릴 수가 있어

불이야-- 소리가 없다고 해서

그 집이 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난 타오르는 태양의 침묵을 원해.

행복하게 미쳐서

귀머거리 불꽃 하나처럼

모든 문을 꼭꼭 닫아버리고

행복 하나로 봉합되길 원해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소리는

나의 고막을 두드리며 미친듯이 끼욱거리고

검은 까마귀

황녹색 측백나무 갈기들은 

모두 불자동차 소리를 지르며

내 귀의 고막을 두드리고 있는데

 

누가 불속의 성자가 가는 길을

방해하는가--

난 커다란 손잡이가 달린 면도기를 들어

조용히 한쪽 귀를 잘라 버린다.

학살처럼 고요한 침묵이 오고

귀가 없는 자화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십자가 위에서 구원받아야 한다고

난 또 피가 흐르는 두 손을 들어

거울 속의 불행한 얼굴을 

그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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