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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이야기/고흐 시편

고호·까마귀떼가 나르는 밀밭 -- 불행이 끊일 날은 없을 것이다 -- 안혜경

by 길철현 2022. 3. 15.

하늘도 들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슬픔으로 가득찬 마음만이 터지면서 

달려나가면

문득 급류되어 흘러가는 길

슬픔이 안겨준 몽상에 취하여

끝없는 들판을 껴안았다.

밀알마다 풀잎마다 바람은 깨웠다.

흔들리게 하였다.

수확기의 밀밭이 거친 소용돌이에 

휩싸여 달아나려 하였다.

 

검푸르게 뒹굴고 있는 하늘,

번득이는 살의가 중얼거리며

들판을 몰아쳤다

대기를 노래시키려면

바람의 작은 속삭임으로도 충분하였다.

마셔라, 향기에 가득찬 가슴을.

폭풍우의 탄생을

밀밭 깊숙한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조각난 꿈의 웅얼거림들.

눈부신 손놀림 아래서 부서져내리던 

불안의 나날.

 

까마귀가 물고 온 권총에는

미소짓는 숨결이 있었다.

까마귀도 내려앉을 수 없는 들판에서

영원한 출발의 발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