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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여는 말

맑은 어느 오후 (160826)

by 길철현 2016. 8. 26.


점심을 먹으려고 현관문을 열었더니(어제는 비가 꽤 내렸고, 밤에는 겉옷이 필요할 정도로 쌀쌀한 느낌마저 들어 현관문을 닫고 잤다) 바람이 상쾌하게 피부에 와닿는다. 그리고 말쑥하게 먼지를 씻어낸 바로 앞 초안산과, 오른쪽으로 보이는 불암산, 수락산의 바위들이 깨끗하기 그지 없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양털 구름 몇 개. 내가 꿈꾸던 날씨에 근접했다고나 할까?


점심을 먹고 나서는 동네나 한 바퀴 돌아야겠다. 일을 적게 한다는 것에는 시간적 여유가 따른다. 결혼을 하지 않아 독신으로 지낸다는 것에는 생활의 무게가 덜 나간다. 억지로라도 좋은 점을 찾으려 하는가?


신계 초등학교와 인덕대 사이의 큰 도로를 무단횡단하려니(이 4차선 넓은 도로는 초안산에서 끝이 나 차량 통행이 별로 없다. 현재 초안산을 넘어가는 도로가 한창 공사 중이라, 올해 말 정도에는 의정부쪽으로 갈 때 그 도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될 듯하다) 초등학생들의 귀가길을 돌보는 신계 초등학교의 학교의 보안관의 눈치가 보여, 신호등 쪽으로 향한다.


[먹거리 닷컴]에서 식사를 하려다가, 월계 지하차도를 건너 [온달과 평강] 호프 집에서 '비빔밥'으로 한 끼를 건넌다. 나오면서 보니까 건너편 호프 집에서도 점심을 팔고 있다. 술집에서 점심을 파는 것. 예전에 정신분석 상담을 받으로 선릉 역쪽으로 갔을 때, 거기는 뷔페를 하는 호프집이 많았지.


같은 건물에 있는 큰 수퍼에서 [조지아 오리지널]을 하나 산다. 580원. 편의점에서 보통 천 원 받는데 엄청나게 사다. 카운터 여직원에서 나는 십 원짜리는 그냥 두라고 한다. 십 원짜리는 이제 예전의 1원짜리만큼 작아졌고, 그 가치도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시간은 자꾸 흐른다. 나는?


산보를 즐긴다. 월계 지하차도 위에서 월계역 쪽으로 따라 난 길을 걸어가다, 사슴 아파트로 들어갔다가, 다시 월계역 북쪽 출입구 쪽에 있는 지하도를 건너 인덕대 쪽으로 올라온다. 천으로 가린 채 인덕 공고 옆의 골목을 따라 인덕 마을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건물을 짓는데 뿐만 아니라, 건물을 해체하는데에도 많은 인력과 돈이 들어간다. 콘크리트 잔해와 그리고 거기서 분리해 낸 철근들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다. 저것들은 흉물스러운 것인가? 지난 7년 동안 내 책을 보관해 두었던 방들도 해체되어 흔적을 잃어가고 있으리라.


벙거지 모자를 쓴 60대 후반 정도의 키가 다소 작은 남자가 반대편에서 걸어 온다. 백두산 여행을 가기 전에 을지로 2가인가 지하철 역에서 5천 원을 주고 사서 여행 동안 잘 쓰고 다녔는데, 그만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 두고 내렸지. 패키지 여행에서 동행하게 된 나이든 분과 군대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정신이 쏠렸던가? 그 뒤에 이마트에서 좀 더 좋은 것을 샀느데, 별로 활용을 못하고 있구나.


(그 전에 액자 가게에서 소나무 그림이며, 아마도 설악산을 그린 풍경이며, 그림들을 몇 점 보았지. 처음에는 실사 출력인가 하는 생각도 했는데, 질감이 살아 있는 것이 출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게 되었지. 큰 여동생 집들이 때 사 준 수채화 그림은 어떻게 되었지? 좋은 그림이란 무엇일까? 좋은 글이란?)


인덕대로 들어선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욕망만이 살아 숨쉴 뿐. 하지만 현재 살아 있잖아. 살아 있다 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여. 비생비사의 상태. 생중사. Death in Life.


눈은 밖으로 나온 뇌라며, 글을 쓰는 것이 정신을 맑게 해주는가? 아니면 정신이 맑아서 글을 쓰는가? 책을 읽는데 눈이 침침하지 않고 글자가 잘 보인다. 그래도 노화는 막을 수 없는 진실이다.


노화는 나의 몫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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