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20160126, 화)
아침 식사 시간. 키가 작은 데다 표정이 다소 어두운 젊은 여자가 '흰색과 갈색 토스트 중 뭘 먹을 것이냐'고 물어서 '흰색'이라고 했더니 하나만 주었다(보통은 두 개를 주는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보이는 동양인 두 명이 들어왔는데, 반갑게도 한국 사람이었다. 젊은 여자가 '토스트'라고 말했지만, 이 분이 그 말을 못 알아들어서 내가 대신 말을 해주었더니 그는 '안 먹는다'고 했다.
서둘러 아침을 먹은 뒤, 지하철을 타고 그리니치로 향했다. 경도의 기준이 되는 그리니치 천문대. 내일이면 런던을 떠나 브론테 자매들이 살았던 호어스(Hawarth)로 갈 예정이었고, 굳이 이곳을 찾을 이유는 없었으나 이곳 역시 콘래드와 관련이 있어서 한 번 찾아보기로 했다. 콘래드의 소설 [비밀 요원](The Secret Agent)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그리니치 천문대를 폭파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모자는 이 건물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라고 했지만, 왜 하필이면 그리니치 천문대였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지하철에 올라탔는데, 꽤 먼 거리였다. 베이커루 노선을 타고 채링 크로스 역까지 와서 환승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 노던(Northern) 노선을 타고 워털루 역으로 향했다(베이커루 노선을 타고 워털루 역까지 그냥 가면 됐는데, 안내 책자를 잘못 읽어서 괜한 고생을 했다). 흑인 남자 승무원에게 물으니까 안내 지도를 꺼내 환승역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워털루 역에서 쥬블리(Jubilee) 노선을 타고 커내리 와프(Canary Wharf)까지는 잘 왔지만 DLR(Docklands Light Railway, 도크랜즈 경전철)로 곧바로 환승이 되지 않아 밖으로 나와서 다시 돈을 내고 타야 했다.
이 지역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런던 중심가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DLR를 타러 가는데 이상하게도 개찰구가 없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이 노선은 공짜인가 의아해하면서 그냥 탔다(나중에 다시 탈 때 보니까 타는 곳 옆에 조그맣게 막대기 같은 것에다 터치하고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그리니치 역에 내리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승무원이 지나가면서 그리니치가 아니라 그 전역인 커티 사크 역에서 내리라고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내 모습을 보고 그리니치 천문대를 구경하러 온 여행객이 틀림없다고 짐작을 했던 모양이다. 커티 사크 역의 완전한 명칭이 '커티 사크 포 매리타임 그리니치'(Cutty Sark for Maritime Greenwich)라는 걸 알았으면 그리니치 천문대가 그리니치 역에 있다고 지레 짐작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역에서 나와서부터 또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배가 한 척 보이고, 템즈 강가에 작은 돔형 건물이 하나 있어서 그것인가 해서 가보았으나 터널형 도로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어디선가 한국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정말 멋있다. 이 배가 진짜 있었구나."
전시 중인 이 배는 이 지역 이름의 유래가 된 커티 사크 호였다. 1869년에 건조된 범선으로 당시에는 가장 빠른 범선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얼마 뒤 범선은 새롭게 등장한 증기선에 밀려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 배도 예외는 아니었다. 콘래드가 이 배를 언급한 걸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도 하는데 세부적인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Cutty Sark라는 말은 이 배가 건조된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짧은 셔츠(혹은 스커트)'라는 뜻이라고 나와 있다. 이 배의 이름을 딴 위스키도 있다고 하는데 기회가 닿는다면 한 번 마셔보고 싶다.)
구글 맵을 보고 가보려고 했으나 방향을 알 수가 없어서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걷다보니 그리니치 해양 대학교에 들어와 있었다(현재 그리니치 대학으로 이용되고 있는 구 왕립 해군 대학[Old Royal Naval College]이다). 이정표를 보고 따라 걷다가 상점거리로 들어섰다. 내복을 입긴 했지만 체육복만 입고 갔더니 날씨가 쌀쌀하고 바람이 많이 불어 또 으슬으슬 추웠다. 비쌀까봐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재킷이 있어야 할 듯해서 그리니치 마켓이라고 씌어진 곳으로 들어갔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문을 열지 않은 곳도 있고, 전체적으로 다소 을씨년스러웠다.
밖으로 나와 다시 거리를 걷는데 벼룩 시장 같은 곳이 나타났다. 몸집이 좋은 중년의 아주머니가 구제 옷을 팔고 있어서 '자켓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내 사이즈를 되물었다. 95, 100 이렇게 말할 수는 없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망설이고 있자, 그녀가 '중대 사이즈냐?'(Medium large)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영국 사람들은 사이즈를 소, 중, 대(small, medium, large)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는 걸 깨닫고는 '중간 사이즈로 달라'라고 말했다. 내 몸집이 한국 사람 체형으로도 중간보다는 약간 작으니까 '작은 것으로 달라'라고 하는 게 더 맞았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벽에 걸려 있는 자켓을 한 번 입어보라고 했는데, 한 눈에 보아도 내가 입기에는 너무 커보였다. 내가 '내가 입기에는 좀 커 보이지 않나요?'(Doesn't it look a bit big for me)라고 하자 그녀의 대답이 재밌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한 번 입어보세요'(How would I know? Try it on). 예의상 한 번 입어 보았으나 정말 거인의 옷을 걸친 모양이었다. 그녀가 '크긴 크네요'(Now I know)라고 말했다.
헌 책방이 있는가 두리번 거리면서 길을 또 걷기 시작했다. 이정표에 나온대로 걸어가니 이번에는 다행히도 맞았다. 선글라스를 쓴 외국 여성도 그리니치 천문대를 찾는 모양인지 이정표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천문대는 잔디가 깔린 널찍한 공원 안에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아주 깔끔했다. 언덕을 올라가니 천문대였다. 구 천문대는 공짜이고, 신 천문대는 입장료가 15파운드(혹은 10파운드). 구 천문대 초입에는 철광석처럼 보이는 오래된 운석이 놓여있었고, 안에는 유치원생,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많이 와서 스크린을 터치하고 기구들을 만지면서 우주를 만끽하고 있었다.
신 천문대에 들어가는 것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으나 여기까지 왔으니 본초 자오선은 보고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표를 구입했다. 하지만 내용물에 큰 흥미가 가지 않아 대충 훑어보며 지나갔다. 왜 이 건물을 폭파하려고 했던가? 다소 투박한 비대칭의 원통 같은 런던 유일의 천문관(Planetarium). 천문학사에 빛나는 핼리와 허셜 등의 이름도 보였고, 메이슨의 [과학의 역사]에 읽었던 정밀한 시계를 만드는 것과 경도 파악의 어려움에 대한 것에 대한 설명도 보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국 사람들의 목소리.
"별 거 없네."
본초자오선이 있는 곳에서는 동반구와 서반구를 오가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실제로는 그냥 연속된 땅에 지나지 않는데 인간의 인위적인 구분에 따라서 극과 극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착잡했다. (이 해 7월에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가 중국 땅과 북한 땅을 오가며 느꼈던 감정도 이와 비슷했다.)
천문대에서 나와서 길거리를 걷다가 옷 가게가 있어서 들어가 봤더니, 영국에서 입기에 적당한 검은 색 재킷이 있었다. 가격표를 보니 아마도 중국제여서 그렇겠지만 35파운드밖에 하지 않아 싼 편이었다. 미디엄 사이즈를 입어 보니 조금 할랑한 게 편하게 입을 수 있을 듯했다. 흑인 종업원에게 50파운드 지폐를 내밀었더니 20파운드를 거슬러 주었다. 현금으로 지불해서 그런가? 왜 5파운드나 싸게 받는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따질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덥고 둔하거나, 아니면 으슬으슬 추위에 떨지 않고 다닐 수 있게 되어서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커티 사크 역 바로 옆에 '워터스톤즈'(Waterstones)라는 카페를 겸한 서점이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콘래드 책은 역시나 인기 있는 작품으로 몇 권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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