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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산행기, 사찰, 사당, 문학관

석남사[울산 상북면 덕현리](20230326)

by 길철현 2023. 3. 29.

[탐방기]
어머니 큰 동생과 함께 언양에 불고기를 먹으러 갔다가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렀다. 일요일이라 다소 늦은 시간임에도 삼십 분 가까이 기다린 다음에야 겨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일종의 떡갈비인 언양 불고기는 기대와 달랐기 때문인지, 양념이 심심해서 인지 우리 가족의 입맛을 충족시키기엔 다소 미흡했다.  
 
 이곳 가지산의 석남사 외에도 안성 서운산 자락에 위치한 석남사도 유명한데 두 절은 한자도 동일하다. 거기다 이 사찰은 1957년 비구니 인홍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비구니 사찰로도 명성이 높다고 한다. 일요일이라 등산객은 물론 절을 찾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어머니 때문에 절까지 걸어 올라갈 수가 없어서 매표소에 문의를 했더니 차를 가지고 올라갈 수 있게 배려를 해주었다. 절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아주 정결했으며, 건물 하나하나 및 주변 조경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 것이 역력했다. 
 
[석남사 홈페이지]

  • 소개 석남사는 울산사람들에게는 늘 열려있는 휴식처로서 늘 푸르른 산림과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제공하며 한겨울에는 가지산의 설경과 어울려 가람을 하얗게 덮은 눈은 우리들에게 절경을 보여줍니다.
  • 위치 석남사(石南寺)는 가지산(迦智山)동쪽 기슭,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위치한 절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입니다. 고헌산맥은 저 멀리 강원도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뻗으면서 줄달음질을 치다가 도중에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산을 형성한 뒤 다시 뻗으면서 형성되는데,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천황산, 영취산 등의 영산 명봉들을 이루어 놓고 있습니다. 가지산에는 석남사, 신불산에는 간월사, 영취산에는 통도사 등의 신라 명찰이 들어 앉게 되었으니 불심과 영통한 법운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명칭 석남사(石南寺)란 이름은 가지산(迦智山)을 석면산(石眼山)이라고 하는데 이 산의 남쪽에 있다해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 가람 헌덕왕(신라제41대憲德王 서기809-826)에 한국에 최초로 선을 도입한 도의국사 (道義國師)가 일찌기 영산 명지를 찾다가 이 곳 가지산의 법운지를 발견하고 터를 정한 뒤, 신라의 호국을 염원기도하기 위해 창건하셨습니다. 도의국사는 신라 제 37대 선덕왕 1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지장의 제자가 되어 그 불법을 물려 받고 법호를 도의라고 개명한 뒤 821년에 신라로 금의환향하여 최초로 선문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남종선의 시조가 되었으나 고국에서는 아직 그의 혁신 이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제자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다가 3년만에 석남사를 창건하고 가지산파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 창건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극락전 · 강선당(講禪堂) · 조사전(祖師殿) · 심검당(尋劍堂) 등 30여 동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건물로 1791년(정조 15년)에 세운 극락전이 있으며 다음 가는 건축물로는 순조 3년에 세운 대웅전입니다. 이 외에도 문화재로 도의국사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보물 제369호 석남사 부도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삼층석탑, 조선 초기의 엄나무구유 · 돌구유 등이 있습니다.
  • 중건중수 창건이후 여러 차례 중건중수(重建重修)를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그 후 1674년 (현종 15년)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영(卓靈), 자운(慈雲), 의철(義哲), 태주 (泰珠)가 중창하였고, 진혜(振慧). 쌍원(雙遠). 익의(益儀). 성진(性眞)이 단청하였으며, 동시에 종과 북 등의 불구(佛具)를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정우(淨佑). 각일(覺日). 석맹(碩孟) 등이 극락전.청풍당. 청운당. 청화당. 향각(香閣)을 증축 하였고, 희철(熙哲)선사가 명부전을 세웠습니다. 1803년(순조 3년)에 침허(枕虛), 수일(守一)선사 등에 의하여 중수되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해졌다가 1912년 우운(友雲)스님에 의하여 다시 중수된 바 있으나 한국전란으로 폐허가 되어 그나마 남아있던 신라고찰의 모습이 모조리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이 3층 석탑은 원래 통일 신라시대에 제작한 것이었으나 폐허가 된 채 방치되다가 1973년에 해체 복원했다.
어디에 있는지?
거대한 구유
부도(승탑) 중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이 많은데, 이것 또한 그러하다.

석남사 동북쪽 언덕의 넓은 대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일찍부터 석남사를 세운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불려 왔다.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8각의 바닥돌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탑신(塔身)을 놓은 모습이다.

기단부의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사자와 구름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에는 상·하·좌·우에서 안쪽을 향하여 낮게 솟은 꽃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겼고, 그 안으로 꽃모양의 띠를 둘렀다. 윗받침돌은 연꽃을 새겨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얇게 새겼고, 앞·뒷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그중 앞면에만 자물쇠가 새겨져 있다. 문의 양 옆으로 신장입상(神將立像)이 배치되어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짧고 서까래와 기왓골이 상세히 표현되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얹혀 있다.

전체적으로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부재로 구성되어 길쭉해 보이며, 바닥돌의 폭이 좁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래받침돌의 구름무늬나 탑신의 신장상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고, 특히 가운데받침돌의 안상조각에서 시대가 내려옴을 볼 수 있으나 각 부분이 완전히 보존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기단부의 가운데받침돌에서 사리장치를 두었던 공간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남은 것이 없었다.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