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팽이처럼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김광규. "좀팽이처럼". 문지. 1988.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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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서 보게 된 거부인 부동산업자와 화자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땅을 '마음대로 . . ./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부의 편중으로 보통 사람들은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긴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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