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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

김광규 - 좀팽이처럼

by 길철현 2024. 2. 8.

좀팽이처럼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김광규. "좀팽이처럼". 문지. 1988.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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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서 보게 된 거부인 부동산업자와 화자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땅을 '마음대로 . . ./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부의 편중으로 보통 사람들은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긴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