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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

서영은, 먼 그대(83년 이상 문학상 수상집), 문학 사상사 [2009년]

by 길철현 2016. 12. 16.

*서영은, 먼 그대(83년 이상 문학상 수상집), 문학 사상사

 

<줄거리>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는 문자는 화장도 하지 않고, 전혀 모양도 내지 않는 사십을 바라보는 노처녀이다. 다른 직원들이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비웃고, 그녀를 따돌리지만 그녀는 담담할 따름이다.

사실 그녀는 십년 전부터 유부남인 한수와 불륜관계를 맺어 왔는데, 인색하고 이기적인 한수에게 희생만 강요당한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일주일에 한 번 그를 만나는 일요일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즐거운 마음으로 보낸다. 천장이 세고, 수도도 없고, 아궁이는 고장난 그녀의 셋방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인이 방세를 올리자 감당을 못하게 된 그녀는 다른 곳으로 방을 옮길 뿐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한수는 그녀에게 무엇을 주기 시작하면, 혹시나 끝없이 요구의 손길을 뻗쳐오지 않을까 겁이 나광업소의 소장이 되어 생활이 풍족해 졌음에도, 사과 하나, 귤 하나도 주지 않는다. 그녀의 형편은 점점 어려워지고, 한수의 풍족한 모습에 그녀의 맘속에서는 끝없는 해일이 일고, 번개가 치고, 폭풍이 몰아치는 종말 같은 나날이 계속 되어, 어느 날은 안주도 없이 단숨에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나서의식을 잃어버린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자신이 눈부신 아침 햇살과 끈적거리는 오물 속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 그녀는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을 나는 철저히 그를 사랑함으로써 복수할 테다라고 부르짖는다.

정권이 바뀌고, 한수는 광산업에 실패한 뒤 문자에게 돈을 요구하는 횟수가 늘어난다. 또 문자는 그녀가 낳은 아이마저 한수의 본처에게 빼앗기고 만다(아니 문자는 한수의 본처에게 자신의 딸 옥조를 순순히 내어 준다). 본처는 문자의 세간이라도 부수며 행패를 부릴 생각으로 오지만, 그녀의 방에는 그 흔한 텔레비전도 경대도 없다.

문자는 월급을 받아서 꼬박꼬박 그에게 주고, 그것으로 부족하자 빚까지 낸다. 그녀의 이모조차도 5부 이자를 조건으로 내세우고서야 그녀에게 돈을 빌려준다. 돈을 받은 한수는 저녁도 먹지 않고 떠난다. ‘그는 이미 한 남자라기보다, 그녀에게 더한층 큰 시련을 주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처럼 여겨졌다.’

 

<인용>

*글쎄, 그녀로선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자기 맘속의 어떤 그윽하고 힘찬 상태, 그걸 뭐라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10)

*그네들은 아무도 문자의 그런 침묵이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아래서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는 절대 긍정적 자신감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몰랐다. 더우기 그 자신감이, 자신들의 키를 훨씬 넘어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어떤 존재와 겨루면서 몇만리나 되는 고독의 길을 홀로 걸어오는 동안 생겨난 것이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11)

*한수는 그녀에게 천 개의 흉터를 내었을 뿐, 그녀가 그 흉터를 스스로 딛고 일어선 지금에 이르러서 그는 이미 그녀의 맘속으로부터 지나가버린 그 무엇이었다. 그가 무자비한 칼처럼 그녀에게 낸 상처 하나하나를 딛고 일어설 때마다, 문자의 정신은 마치 짐을 얹고 또 얹고 그러는 동안 자기 속에서 그 짐을 이기는 영원한 힘을 이끌어낸 불사(不死)의 낙타 같았다.

그러나 한수는 문자의 주위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그런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바보스러울 만큼 착하다고 여겨지던 그녀가 딱 한번 <무서운 여자>하고 생각된 때가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되었는지 그 이유는 그 자신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13)

*콩나물을 다듬든, 연탄불을 피우든, 지붕 위의 눈을 치우든 그를 생각하노라면 어딘가 높은 곳에 등불을 걸어둔 것처럼 마음 구석구석이 따스해지고, 밝아오는 것을 느꼈다. (17) 한수를 사랑할 때.

*한수는 그녀가 살코기를 집어줄 때마다 입을 딱 벌려 받아먹기만 할 뿐, 자기도 그녀의 입에 그 고기를 먹여주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한수의 마음은 무디고 이기적이어서 온 방안에 가득찬 금빛을 보지 못했고, 가만히 있어도 그 침묵이 노래임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녀의 몸을 만지면서도 잘익은 과육에서 나는 것과 같은 향기가 자기 손가락에 묻어나는 것도 몰랐다. (18)

*고통이여, 어서 나를 찔러라. 너의 무자비한 칼날이 나를 갈가리 찢어도 나는 산다. 다리로 설 수 없으면 몸통으로라도, 몸통이 없으면 모가지만으로라도. 지금보다 더한 고통 속에 나를 세워놓더라도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거야.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을 나는 철저히 그를 사랑함으로써 복수할 테다. 나는 어디도 가지 않고 이 한자리에서 주어진 그대로를 가지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테야. 그래, 그에게 뿐만 아니라, 내게 이런 운명을 마련해놓고 내가 못견디어 신음하면 자비를 베풀려고 기다리고 있는 신()에게도 나는 멋지게 복수할 거야! (21)

*난 이제 아무것도 아냐, 우리집 문전엔 인적이 끊겼어, 그렇지만 너까지 날 괄시하면 죽여버릴 테다. (22) 한수가 문자에게

*하지만 이제 내 속으로 난 혈육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아. 위안받기를 거부하는 일이 이제는 너무 힘들어! 고통스러워! (23)

*징기스칸으로 하여금 영원한 영웅이 되게 한 것은 아들을 버림으로써 사랑까지도 밟고 지나갈 수 있었던 바로 그 힘이었던 것 같아요. 소유에 대한 집념과 마찬가지로 혈육 역시도 초극(超克)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 여겨져요. 나는 꼭 누구랑 끊임없이 대결하는 긴장상태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25)

*대부분의 인간은 시달리는 것, 즉 갈증을 몹시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들만은 갈증뿐인 사막속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27) (리비아의 사막 오지에 사는 사람들)

*가엾은 자식. 엄마가 네게 지운 짐이 너무 가혹하지? 하지만 너도 네 힘으로 네 속에서 낙타를 끌어내야 한다. 엄마가 너의 삶을 안락한 강변도 있는데 굳이 고통의 늪가에다 던져놓은 이유를 그 낙타가 알게 해줄거야. 그것이 사랑이란 것을 알게 해줄 거야. (28)

*문자는 . . . []안으로 들어갔다. 발등이 터진 한수의 헌구두를 집어 한쪽으로 가지런히 세워놓고 방문을 열었다. 한수는 곯아떨어져 자는 중이었다. 빈 고량주 병이 머리맡에 나딩굴었다. 그의 머리는 덥수룩하게 자라 귀를 덮었다. 와이셔쓰 깃은 때에 절어있었다.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문자에겐 이제야말로 내가 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순간순간 그의 모질고 이기적인 성격을 엿볼 때마다 문자는 맘속으로 울고 입술로는 웃었다. (31)

*그는 이미 한 남자라기보다, 그녀에게 더 한층 큰 시련을 주기 위해 더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것에 도달하고픈 열렬한 갈망으로 온몸이 또다시 갈기처럼 펄럭였다. (32)

 

<단상>

*문자, 남성 문자(장항동에서)

글의 힘의 7,8십 프로는 스타일에서 나오지 않을까?

사랑에 관한 관심. 기독교적 사랑.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키에르케고르, 오르테가 가세트

서영은의 작품에 대한 연구. (송영의 것도) 역시 밀고 나가는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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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는 절대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사람들이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문자가 설 수 있으려면, 희망의 빛, 그 빛은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어야 할 터인데, 그 사람들에게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문자의 그 노력은 헛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목이 <먼 그대>인 것을 보면, 문자 주변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그린 것은 어찌 보면 문자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신에게로, 혹은 절대자에게로, 혹은 하나의 신념에 도달하는 길은 멀고 먼 고난의 가시밭길이리라. 그렇지만, 그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그 시련의 피를 우리는 달게 들이킨다. 들이키려 한다. 뭐 그런 것일까? (선생님에게 편지를 쓸 것인가?) (김연수의 코끼리의 상징과의 대비) [김연수 론을 써볼 수도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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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순교의 정신. 황석영의 [객지]에서는 그 순교의 정신이 영웅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문자의 그것은 어떠한가? 노예의 도덕은 아닌가? 노예의 도덕과 초인간의 도덕의 차이가 무엇이었든가? 외부적인 것. 내부적인 것.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 공부 없이는 제대로 된 글을 쓰기 힘들다.) 급하지 않다면 찬찬히 더 연구를 해나가라. 끓는 피만 따르지 말고.

 

<촌평>

이 단편 소설을 나는 91년경에 처음 읽었다(이 작품은 83년도 <이상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때, 노트에다 주인공인 문자는 ‘[죄와 벌]의 쏘오냐나 전당포 노파의 동생(리자베타?)를 떠올리게 한다라고 짤막하게 적어두었다. 18년 전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내 머리 속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겉으로 절대 화를 내지 않는, 그리고 남의 뜻에 따라만 가는 지나치게 순종적으로 비쳐지는 문자라는 주인공이 이해할 수 없다, 당황스럽다는 생각은 계속 지녀온 듯하다. 그저께부터인가 문득 이 작품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요즈음 다시 문학에 흥미를 붙여, 소설을 읽고 쓰는 일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며칠 전에는 작품을 하나 쓰려고 대성리까지 답사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여행 결과 아직 그 작품을 쓸 때가 아니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작품의 배경이 함박눈이 내린 날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 때를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 때까지 내 안에서 그 작품을 키워나가야겠지), 그 보다는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이 부쩍 강해졌는데(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나 타인, 더 나아가서는 세상 만물에 대해 가지는 따뜻하고 애틋한 마음 뭐 그런 것), 구체적으로 잡히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나 겉보기에 마조히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서영은 자신은 자신의 이 작품에 대해 그녀를 통해 진지하게 삶을 살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어요. ‘그녀가 상처받고도 쾌감을 느끼는 여성 마조히스트가 아니냐고 말한다면 나는 그녀처럼 어이없이 빙긋 웃을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작품을 다 읽고 난 지금 내 마음은 그다지 편치 못하다. 보통 우리가 말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그 내용보다는 말하는 어조나 톤 등의 전달 방식이라고 하는 것처럼, 글에서도 스타일(문체)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그런 점에서라면 이 작품은 손색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소설 작품으로서 살아 있다. 문제는 과연 주인공 문자의 생각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소설은 윤리나 도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장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소설도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비켜갈 수는 없다. (예전부터 가져온 궁금증 중의 하나가 우리가 비윤리적이라고 여기는 것--피상적인 도덕률이 아니라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 보더라도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 이를 테면 나치에 의한 유대인의 대량 학살같은 것(이에 반해 사드의 작품처럼 변태 성욕을 다룬 것은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면서도 그것을 비윤리적이라고만 몰아세울 수는 없는 면이 있다)--을 찬양한 훌륭한 예술작품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 답을 나는 오랫동안 찾을 수가 없었는데, 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을 보면서 하나의 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는 남북 전쟁에서의 노예 해방을 비난하고, KKK단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서 작가가 윤리적으로 옳지 않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좋은 작품,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는 길이 완전히 봉쇄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작품의 윤리성이 그 작품의 우열을 정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겠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언제나 한 작품을 평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우선 든 생각은 이 작품이 단순히 순교자적인 인물을 그려낸 것도 아니라는 것이고, 또 작가가 밝힌 진지하게 삶을 살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말에도 선뜻 동조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영은은 한 번 연구해 볼만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따라서 실제로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으나, 이 작품에 대해 좀 더 의미 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작품 전체 혹은 일부라도 찬찬히 읽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섣부르기는 하지만, 다음 작업을 위한 초안 내지는 아이디어 제시라는 측면에서, 일단 내가 현재 이 작품을 읽고 느낀 느낌을 몇 가지 적어볼까 한다. 먼저 문자가 갖게 된 절대 긍정적 자신감(문자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한수가 무자비한 칼처럼 자신에게 낸 무수한 상처를 스스로 딛고 일어서는 가운데 형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어느 누구도 그녀의 그러한 자신감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보처럼 착하기만 하는 인물, 늘 당하고도 싫은 소리 한 번 못하는 인물로만 여기고 있다(심지어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이모조차도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5부 이자를 받으려 한다)는 점이다. 한수만이 그녀를 딱 한번 <무서운 여자>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주변 인물의 몰이해는 그녀의 고매한 정신이 범인의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작가의 의도에 가까우리라.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문자의 그러한 태도는 피상적이고 오류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이 지닌 상식이 갖는 힘을 있는 힘껏 무시하는,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본능적인 삶의 목소리마저 외면하는 외곬수라는 생각도 떨쳐버리기 힘들다. 작가는 문자가 갖는 인생관을 옹호하기 위해 두 가지 에피소드를 제시하는데, 그것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 하나는 안락함을 뿌리치고, 사막의 오지에서 고난의 삶을 사는 리비아의 사막 부족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를 본처에게 내 준 것에 대해 이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징기스칸으로 하여금 영원한 영웅이 되게 한 것은 아들을 버림으로써 사랑까지도 밟고 지나갈 수 있었던 바로 그 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통을 피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견디어 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애써 고통을 좇는 듯한 인상을 주는 그녀의 태도는 아무리 보아도 이쯤에서는 마조히즘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에 반해 황석영의 <객지>에 나오는 주인공 동혁의 행동(실제 사건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전태일이리라)은 자기 파괴에서 오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수의 타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희생한다는 영웅적? 결단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 할 점은 한수를 만나면서 문자의 감정의 변화, 혹은 절대 긍정적 자신감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한수와 불륜을 시작할 무렵 그녀의 마음은 한 마디로 향기로운 꽃이요,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 무엇이었다. 그와의 만남이 일주일에 한 번 뿐이고,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해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 상황에서 그녀의 마음은 해일이 일고, 번개가 치고, 폭풍이 몰아친. 아이를 빼앗길 때에는 위안받기를 거부하는 일이 이제는 너무 힘들어! 고통스러워!’하고 토로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때에 젖은 와이셔츠 깃에 초라한 모습으로 잠든 그를 보면서, ‘이제야말로 내가 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그래서, 그녀에게 한수는 이미 한 남자라기보다, 그녀에게 더 한층 큰 시련을 주기 위해 더높은 곳으로 떨어지는 신의 등불처럼 여겨진다. 대충 살펴본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처음의 짧은 순간을 제외하고는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고, 그 다음 그것을 통해 더높은 곳’(그곳이 어디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서영은의 작품 세계를 규명하는 핵심이 될 것이고, 그녀의 인생관의 정당성을 따지는 자리가 될 것이다)에 도달하려는 열망에 휩싸인다.

가만히 살펴보면 사랑이라는 용어가 상반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징기스칸의 에피소드에서 드러나는 짓밟고 지나가야 할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초라한 한수의 모습에서 느끼는 진정한 사랑이다. 이 부분도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데, 앞부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정, 여기서는 혈육의 정이라고 한다면, 뒤의 것은 인간 정신이 지향하는 극점, 신의 말씀으로서의 사랑으로 제시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렇게 단순하지도 단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일단 이 시점에서는 부족한 대로 느낌을 따라 적어 보았다. 이 만큼 적고 보니 내 마음이 왜 불편한지를 좀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정은 현실적이고 분명한 반면(그렇다고 거기에만 집착하라는 말은 아니겠지만), 문자가 지향하는 진정한 사랑은 실체가 불분명하고(과연 그런가?), 정당성 여부도 의심스럽고, 무엇보다도 엄청난 고통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 점이 나는 서영은이 극구 부인함에도 그녀 자신을 마조히스트라고 볼 수 있는 단서가 아닌가 한다. 삶에 따르기 마련인 고통은 우리의 정신을 단련시킨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홍수로 전 재산을 잃어버린 여인이 인터뷰를 하면서 말했다. 하느님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만을 주시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녀의 사랑은(글이 자꾸 그녀를 비난하는 쪽으로 흐르는데, 지금 든 이 생각은 섣부른 것이면서도, 또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녀를 좀 더 큰 틀에서 본다면 다르게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니체가 고귀한 덕에 대비되는 노예의 덕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이 부분도 정당하게 쓰자면 우선 니체를 좀 읽어야 한다. 니체 이야기는 김우창의 글과 그리고 이창재의 글을 읽은 데서 차용한 얄팍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좀 긍정적인 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C.S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이 책도 읽은 것이 아니라, 안소니 홉킨스가 나온 [Shadowlands]라는 영화에서 들은 부분을 차용한 것이지만) 것처럼, 고통은 우리 인간의 영혼을 단련시키고, 그래서 연마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게 하는 면이 있다. (글이 끝에 와서는 지지부진이다. 그래도 이나마 적어낸 것은 다음 작업을 위한 하나의 발판은 될 듯하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적 도덕에 대한 비판인 듯하다.)

(낙타의 상징의 문제, 김연수의 코끼리의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