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 및 감상408 김광규 - 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깊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 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지성사. 1979(1989). - 정상적이지 않은 나라에 살게 되어 청각이 시각을 대신하는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흥미롭게 표현. 우리나라의 답답한 당시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 청각이 시각을 대신하는 상황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2023. 9. 12. 김광규 - 치매환자 돌보기 어려운 세월 악착같이 견뎌내며 여지껏 살아남아 병약해진 몸에 지저분한 세상 찌꺼기 좀 묻었겠지요 하지만 역겨운 냄새 풍긴다고 귀여운 아들딸들이 코를 막고 눈을 돌릴 수 있나요 척박했던 그 시절의 흑백 사진들 불태워버린다고 지난날이 사라지나요 그 고단한 어버이의 몸을 뚫고 태어나 지금은 디지털 지능 시대 빛의 속도를 누리는 자손들이 스스로 올라서 있는 나무가 병들어 말라죽는다고 그 밑동을 잘라버릴 수 있나요 맨손으로 벽을 타고 기어들어와 여태까지 함께 살아온 방바닥을 뚫고 마침내 땅속으로 돌아가려는 못생긴 뿌리의 고집을 치매 걸렸다고 짜증내면서 구박할 수 있나요 뽑아버릴 수 있나요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333. 2023. 9. 12. 김광규 - 책의 용도 이십팔 년간 사용해온 연구실 비워주려니 지나간 세기의 고전 양서들 천여 권이 쏟아져 나옵니다 집의 서재도 발 디딤 틈 없이 책이 쌓여 옮겨갈 곳도 없습니다 책 욕심 많고 책 사랑 깊던 젊은 날의 흔적들 한 권 한 권 책갈피마다 남아 있어 선뜻 내 손으로 버릴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인터넷 검색에 열중할 뿐 오래된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져가지도 않지요 정년퇴임을 맞은 백면서생이 어찌할 바 모르고 돌아서서 창밖의 교정만 바라볼 때 청소원 아줌마와 수위 아저씨가 나타나 순식간에 책더미를 치워줍니다 근으로 달아서 파지로 팔면 용돈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333. 2023. 9. 12. 김광규 -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2023. [후감] 시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던가? 그리고 지금은 또 헤어졌다 다시 만난 연인처럼 얼마나 불을 태우고 있는가? 시 읽기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김광규의 시집은 거의 다 사고, 또 다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시인들보다 명징하고 일상적이고 자기반성적이면서도 동시에 세태 비판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 마디로 친숙하고 읽기 쉽다. 산문적이다. 그의 시가 40년 넘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온 것은 쉬움이라는 말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어떤 단단함'이 있기 때문은 아닌지? 이 세상을 침착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하게 보는 눈. 올해에 나온 이 시집에는 인간의 기술 문명의 발달로 인한 자연과의 소외의 문제와 함께, 시인 자신의 노화에 따르는 여러 현상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의.. 2023. 9. 12. 이전 1 ··· 30 31 32 33 34 35 36 ··· 10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