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 및 감상409 김광규 - 서서 잠든 나무 5층 연립주택보다 훨씬 높이 자란 가죽나무 올해는 여름내 싹 트지 않고 꽃 피지 않았다 나뭇잎 하나도 없이 검은 골격만 허공에 남긴 채 살기를 멈춰버린 것 같다 겨울보다도 앙상한 모습으로 숨이 멎어버렸나 신록의 숲속에서 날아오는 텃새들 까치 까마귀 비둘기 직박구리 한 마리도 나뭇가지에 내려앉지 않는다 죽음의 뿌리 까맣게 땅속에 내린 채 뒷마당에 서서 잠든 가죽나무 동네 이웃들 지나가며 왜 죽었나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75. 2023. 8. 28. 김광규 - 시를 읽는 사람들 멧새들 지저귀는 영롱한 소리 가을바람 빗소리에 귀 기울이며 홀로 생각에 잠기던 사람 해넘이 수평선 바라보다가 밤하늘 반짝이는 별들 헤아리고 잎 떨어진 갈잎나무 사랑하던 사람 이슥하도록 서재에 불 밝히며 짧은 글 몇 편 남기고 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 수만 명 떼 지어 주먹 불끈 쥐고 부르짖는 시청 광장 가로질러 혼자서 고개 숙이고 걸어간 사람 우리는 그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묻고 싶구나 그대들에게 시를 읽는 사람들이여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72 2023. 8. 28. 김광규 - 고요한 순간 창밖의 후박나무 가지에 앉아 귀가 먹먹하게 울어대는 매미를 숲에서 날아온 멧비둘기가 잽싸게 낚아채 채마밭 건너편으로 몰고 갔다 매미의 다급한 비명 소리 금방 뚝 끊어지고 고요한 순간이 뒤따랐다 여름내 듣지 못한 짧은 침묵 들려주면서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61. 2023. 8. 28. 김광규 - 무정한 마음 치킨 배달 오토바이도 끊어지고 메밀묵 장수도 이미 지나갔다 편의점 창백한 엘이디 형광등과 자동차 블랙박스 파란 불빛만 어둠을 지키고 있는 밤 아무도 오가지 않는 홍제내 골목길로 배 불룩한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간다 정확하게 약속을 지키려는 듯 새로 태어날 생명들만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시간 온 동네가 코를 골며 잠들었는데 낡은 솜이불 뒤척이면서 왜 그대만 혼자 깨어 있는가 대답할 수 없는 물음도 들어본 지 오래되었다 아무리 눈 감고 귀막아도 새카만 침묵에 빠진 잠 무정한 마음 끝내 다가오지 않는다 조간신문과 우유 배달이 올 때까지 선하품만 가끔 보내올 뿐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56. 2023. 8. 28. 이전 1 ··· 33 34 35 36 37 38 39 ··· 10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