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시 및 감상408

김광규 - 그 짧은 글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 했지* 하지만 이것은 너무 단호한 시학 아닌가 드넓은 산하 무수한 잡초들도 저마다 이름이 있기 마련 의미 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나 온 세상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 혼자서 귀 기울이고 중얼거리며 그 속에 숨은 뜻 가까스로 불러내는 그런 친구가 곧 시인 아닌가 비록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메마른 사막에 감춰진 수맥이라도 촉촉하고 부드럽게 살려내는 그 짧은 글이 바로 시 아닌가 어려운 시학 잘 모른다 해도 * 예컨대 아치볼드 매클리시의 '시학'에 나오듯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33. 2023. 8. 29.
김광규 - 시인이 살던 동네 나뭇가지와 잎사귀 뒤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제 목소리로 바꿔보려고 뒷동산 갈잎나무들 얼마나 오랫동안 수런거렸을까 귓전 스쳐가는 그 소리 자기 말로 적어보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 사람은 잠 못 이루고 몸 뒤척이며 귀 기울였을까 아무도 하지 않는 쓸데없는 짓 평생 되풀이하다가 떠나간 자리에 오늘은 빛바랜 낙엽들 굴러다니고 구겨진 낙서 몇 장 드문드문 행인들이 밟고 가는 뒷골목 소식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된 어느 시인이 살던 동네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82. 2023. 8. 29.
김광규 - 개 발자국 온몸이 누런 털로 덮이고 슬픈 눈에 코끝이 까맣게 생긴 녀석. 뒤꼍 개집에서 봄여름 가을 나고, 겨울에는 차고 한구석에서 뒷발로 귀를 털면서 나이를 먹었지. 늘그막엔 주인집 거실 바닥에서 코를 골며 낮잠을 자기도 했다. 놈은 이 세상에 태어나 열여덟 해를 혼자 살았다. 물론 극진하게 보살펴주는 주인 내외와 딸이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고무친의 외톨이 아니었나. 천둥 벼락 치면서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놈이 위층 서재까지 뛰어 올라와 주인의 책상 아래 몸을 숨기기도 했다. 겁이 났던 모양이다. 놈을 야단치고 밖으로 쫓아내는 악역을 맡은 바깥주인도 이럴 때는 못 본 척 그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준 셈이었다. 이렇게 정든 놈이 몸뚱이만 남겨놓고 세상 틈새로 사라져버린 다.. 2023. 8. 29.
김광규 - 서서 잠든 나무 5층 연립주택보다 훨씬 높이 자란 가죽나무 올해는 여름내 싹 트지 않고 꽃 피지 않았다 나뭇잎 하나도 없이 검은 골격만 허공에 남긴 채 살기를 멈춰버린 것 같다 겨울보다도 앙상한 모습으로 숨이 멎어버렸나 신록의 숲속에서 날아오는 텃새들 까치 까마귀 비둘기 직박구리 한 마리도 나뭇가지에 내려앉지 않는다 죽음의 뿌리 까맣게 땅속에 내린 채 뒷마당에 서서 잠든 가죽나무 동네 이웃들 지나가며 왜 죽었나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사. 75. 2023.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