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나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다른 남자를 좋아하던 -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나에게도 가능성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부질 없이 쫓아다닌 것일까 - 여자와 같이 그 당시 막 개봉된 이 영화를 보기로 했으나, 여자는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꾸었고, 대신에 우리는 다른 곳으로 놀러갔다. 그것이 벌써 16년 전,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라는 것이 잘 믿지지 않는다. 그저께 일 하는 것이 귀찮아 좀 쉬자는 마음으로 VOD를 여기저기 돌려보다가 무료 영화에 이 영화가 올라와 있어서, 재빨리 선택을 했다.
그 때만 해도 왕가위(왕자웨이)가 누구인지도 몰랐었는데, 지금은 [동사서독]의 감독으로 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동사서독]은 전혀 사전지식 없이 그냥 무협영화인 줄 알고 보았다가, 내용이 너무 복잡해서 한 번 더 보고, 화면이나 내용 모두 아름다운 이야기, 그것도 빗나간 사랑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이 감독의 또 다른 유명한 영화 [중경삼림]은 본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시 무료 VOD에 올라와 있어 조금 보았는데 시간이 될 때 다 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머리에 떠올랐던 것은 데이비드 린 감독의 명편인 [밀회](Brief Encounter)였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란 것이 제인 오스틴 류의 결혼으로 이어지는 행복한 동화 같은 내용보다는 - 그것은 그것대로 또 흥미롭지만(흥미로운 사실은 그러한 해피 엔딩을 그린 소설들을 쓴 제인 오스틴은 정작 독신으로 지냈고, 그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Becoming Jane]에서도 그녀의 짧고 강렬한 사랑은 이별로 끝이 났다) - 아마도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나,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서처럼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느낌인데 이것은 사실 좀 더 공구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사랑의 유한성과 그 파국을 그린 대표적인 영화는 보 비더버그 감독의 스웨덴 영화 [엘비라 마디간]이리라).
1960년대라는 좀 오래 지난 시간을 배경으로 지역 신문 사에서 일하는 초 모완(양조위 분)과 수출회사의 비서로 근무하는 수 리첸(장만옥 분)의 잔잔한(그러면서도 진부할 수 있는)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를 왕가위 특유의 섬세함(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영화를 좀 더 곱씹어 보면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는데, 누군가의 말처럼 기본적으로 그의 태도는 멜로드라마적인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뭔가 그만의 기법이 있다. 일단은 영상이 주는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동사서독]을 볼 때 특히 느낀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담배 연기가 일으키는 무늬, 두 사람을 더욱 가깝게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는 비,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커튼 등이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것을 시적 감수성이라고 불러야 할지. 혹은 직관력이라고 해야 할지)으로 멋지게 그려내고 있다. 서로 상처 입은 두 사람의 불륜(?) 관계는 하지만, 두 사람의 도덕성으로 인해 한계를 넘지 않고 이별로 마무리 되면서도 아쉬움과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감독이 노린 것인가?
왕가위가 각본을 쓴 이 영화는 그 배경이나 디테일에 있어서는 왕가위의 것임에 분명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영화는 [밀회]와 큰 틀에서는 유사한 면이 많다(이제는 [밀회]라는 이 영화가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전체적인 인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밀회]에서는 이 영화에서처럼 서로가 배우자로부터 상처를 입었다는 내용이 없지만, 그래도 유부녀와 유부남이 서로 이끌리고 결국에는 이별한다는 면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밀회]가 유명한 영국 극작가인 노엘 카워드의 [Still Life]라는 희곡을 영화화 한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언제나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면 - 어느 한쪽으로 휩쓸린 상태는 너무 정신이 없거나, 너무 답답하다고 한다면 - 이 영화는 그 줄타기가 빚어내는 무늬를 잔잔한 가운데서도 절묘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장만옥은 [첨밀밀]에서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그려졌는데,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장만옥의 패션쇼"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개량식이라고 해야 할 치파오가 정말 여러 벌 나온다.)
한 때 홍콩 영화가 상당한 인기를 누렸는데, 지금은 좀 시들한 듯하다. 대신에 우리나라 감독들이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들고 있다. 소재라는 것이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고 한다면, 문제는 어떻게 현재 우리의 의식을 꿰뚫을 수 있도록(좀 무서운 말인가?) 디테일을 구성하는가,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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