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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한국현대시

박세영 - 산제비

by 길철현 2024. 8. 21.

산 제 비

                                  박세영

 

남국에서 왔나,

북국에서 왔나,

산상에도 상상봉,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고나,

너희 몸을 붙들 자 누구냐,

너희 몸에 아는 체할 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같이 하늘을 꾀어

마술사의 채쭉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너희는 장하고나.

 

하로 아침 하로 낮을 허덕이고 올라와

천하를 내려다보고 느끼는 나를 웃어다오,

나는 차라리 너희들같이 나래라도 펴보고 싶구나,

한숨에 내딛고 한숨에 솟치어

더 나를 수 없이 신비한 너희같이 돼보고 싶고나.

 

창들을 꽂은 듯 희디흰 바위에 아침 붉은 햇발이 비칠 제

너희는 그 꼭대기에 앉어 깃을 가다듬을 것이요,

산의 정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를 제,

너희는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휘정거리며 씻을 것이요,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들을 것이다.

 

묏돼지가 붉은 흙을 파헤칠 제

너희는 별에 날러볼 생각을 할 것이요,

갈범이 배를 채우러 약한 짐승을 노리며 어슬렁거릴 제,

너희는 인간의 서글픈 소식을 전하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알려주는

천리조일 것이다.

산제비야 날러라,

화살같이 날러라,

구름을 위정거리고 안개를 헤쳐라.

 

땅이 거북등같이 갈라졌다,

날러라 너희들은 날러라,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을 위하여

구름을 모아는 못 올까,

날러라 빙빙 가로 세로 솟치고 내닫고,

구름을 꼬리에 달고 오라.

산제비야 날러라,

화살같이 날러라.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헤쳐라.

                                                            <1936, 낭만>

 

*휘정거리다 물 따위를 함부로 자꾸 젓거나 하여 흐리게 하다

 

- 나라를 빼앗긴 간고한 상황에서 그와 대비되는 자유와 힘의 상징으로 산제비를 노래한 시이다. 쉬운 언어로 간곡하게 현실의 암울함을 상상으로나마 타파해 보려 애쓰고 있다. 당시에는 농민이 민중의 대표로 손색이 없으나(마지막 연의 가난한 농민), 직업군이 다양해진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