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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김광규91

김광규 -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가진 것 하나도 엇지만무명 바지저고리흰 적삼에 검은 치마맨발에 고무신 신고나란히 앉아 있는 머슴애와 계집아이사랑스럽지 않은가착한 마음과 젊은 몸뚱이밖에는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이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곳마다땅에는 온갖 꽃들 피어나고지붕에는 박덩이 탐스럽게 열리고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히고해와 달과 별들이 하늘에 가득하네팔을 꽉 끼고 함께 뭉치면믿음직한 두 친구뺨을 살며서 마주 대면사이 좋은 지아비와 지어미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너와 나의 어버이가진 것 하나도 없이 태어났지만슬기로운 머리와 억센 손으로힘들여 이룩한 것 많지 않은가어느새 여기에 와 앉아 있네우리의 귀여운 딸과 아들 김광규.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문지. 1998. 118-119. - 김광규의 시가 답답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과거에 대한.. 2024. 8. 23.
김광규 - 듣고 싶은 입 듣고 싶은 입                                             김광규 맥주와 포도주는 물리지 않았다. 그러나부르스트와 케제, 감자와 돼지고기, 닭튀김과 훈제 연어 따위에 넌더리 났다.한국 식당이나, 때로는 교민 가정에서고추장, 김치, 된장국, 불고기, 잡채, 생선구이 따위를배불리 먹고 돌아와도외국시 번역처럼좀처럼 만족할 수 없었다.조선오이, 알타리무, 새우젓, 물오징어와 먹걸치, 메밀묵과 찹쌀떡 따위는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창밖을 지나가는 소리로 듣고 싶었다.귀는 낯선 침묵에 피곤해지고입은 아무리 떠들어도 적적하기만 했다.               김광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지만]. 문지. 1998. 13. - 산문적인 이 시는 타국살이에서 오는 향수를 표현하고 있는데,.. 2024. 8. 22.
김광규 - 선인장꽃 선인장꽃                          김광규 탁상 시계 초침 소리에 귀를 맡기고방바닥에 벌렁 누워서참으로 오래간만에 피어난 선인장꽃을 바라본다줄기도 가지도 잎도 없이 솟아오른 희불그레한 목숨기다리지 않아도 태어나고기다려도 오지 않는다59번 버스 다섯 대가 지나가도록 약속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자꾸만 막히는 세검정 삼거리건널목을 다스리는 신호등 앞에보행자들의 착한 발걸음늙은 소나무 위에 둥지를 튼 두루미는다리가 길어서 알을 품기 힘들고무수한 소절의 음계를 오르내리는 동안땅속을 파고 가며 볼록한 자국을 남기는 두더쥐의 속도로 이승을 떠나서평생 즐겨 먹던 무뿌리를 아래서 올려다보게 되려나여객기 창문으로 내려다보니조그만 단발 비행기 한 대가 까마득히 먼 발 밑을 지나가고 있다마주치지도 않고되돌아.. 2024. 8. 22.
김광규 - 느릿느릿 느릿느릿                   김광규 가끔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가는 전나무숲 산책길을 가로질러민달팽이 한 마리기어간다혼자서가족도 없이걸어잠글 창문이나초인종 달린 대문은 물론도대체 살면서 지켜야 할 아무런 집도 없이그리고 안으로 뛰어들어가거나밖으로 걸어나올 다리도 없이보이지 않는 운명이 퍼져가는 그런 속도로민달팽이 한 마리몸으로 기어간다눈을 눕힌 채생각도 없이 느릿느릿 김광규.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문지. 1998. 59. ‘보이지 않는 운명이 퍼져가는 그런 속도’라는 비유는 잘 와닿지는 않지만 흥미롭다. 이 민달팽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느림의 미학’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익숙한 것이라서 큰 울림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톰 건의 ‘달팽이를 생각하며.. 2024.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