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기 전에
김광규
걸어 다녀도 시간이 넉넉했던 시절
그때를 아무리 그리워해도 소용없습니다 이제는
값비싼 승용차도 고속전철도 마찬가집니다
직업에 상관 없이 출퇴근하는 데
한두 시간씩 걸리고 때로는
자동차 고치느라고 오후 내내
정비센터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기도 합니다
시간의 바퀴는 보증수리도 안 되지요
주말이면 식구들과 세탁물 찾아오고
할인매장에 가서 장 보는 것도 큰일입니다
도심에서는 차 세울 곳 찾기 힘들고
주차비도 여간 비싸지 않습니다 이제는
어디서나 기다리는 시간만 자꾸 길어지고
그나마 남은 시간 점점 줄어듭니다
퀵보드 타고 가볍게 스쳐가는 아이들
시간을 앞질러 달려가는 동안 어버이들은
잠도 안 자며 맹렬한 속도로 뒤쫓아오는
시간의 바퀴 피해보려고 백미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가속페달 밟아보지만
소용없습니다 이제는 주행차선을
양보하고 천천히 갓길로
들어섰다가 인터체인지 진출로 따라
내려가야지요 어둡기 전에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지. 2007. 92-93.
- 시간은 나이가 시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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