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시 및 감상/김광규

김광규 - 어둡기 전에

by 길철현 2024. 9. 6.

어둡기 전에

                      김광규

 

걸어 다녀도 시간이 넉넉했던 시절

그때를 아무리 그리워해도 소용없습니다 이제는

값비싼 승용차도 고속전철도 마찬가집니다

직업에 상관 없이 출퇴근하는 데

한두 시간씩 걸리고 때로는

자동차 고치느라고 오후 내내

정비센터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기도 합니다

시간의 바퀴는 보증수리도 안 되지요

주말이면 식구들과 세탁물 찾아오고

할인매장에 가서 장 보는 것도 큰일입니다

도심에서는 차 세울 곳 찾기 힘들고

주차비도 여간 비싸지 않습니다 이제는 

어디서나 기다리는 시간만 자꾸 길어지고

그나마 남은 시간 점점 줄어듭니다

퀵보드 타고 가볍게 스쳐가는 아이들

시간을 앞질러 달려가는 동안 어버이들은

잠도 안 자며 맹렬한 속도로 뒤쫓아오는

시간의 바퀴 피해보려고 백미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가속페달 밟아보지만

소용없습니다 이제는 주행차선을

양보하고 천천히 갓길로

들어섰다가 인터체인지 진출로 따라

내려가야지요 어둡기 전에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지. 2007. 92-93.

 

- 시간은 나이가 시속이다. 

 

'한국시 및 감상 > 김광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규 - 누렁이  (3) 2024.09.11
김광규 - 떨어진 조약돌  (0) 2024.09.10
김광규 - 치매환자 돌보기  (0) 2024.09.06
김광규 - 생사  (0) 2024.09.06
김광규 - 땅거미 내릴 무렵  (0) 2024.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