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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08

김선우 - 능소화 능소화                  김선우 꽃 피우기 좋은 계절 앙다물어 보내놓고 당신이나 나나 참 왜 이리 더디 늙는지 독하기로는 당신이 나보다 더한 셈 꽃시절 지날 동안 당신은 깊이깊이 대궁 속으로만 찾아들어 나팔관 지나고 자궁을 거슬러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운명을 찾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죽이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다 그러다 염천을 딱! 만난 것인데 이글거리는 밀납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처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능소(凌霄)야 능소야, 모루에 올려진 시뻘건 쇳덩어리 찌챙찌챙 두드려 소리를 깨우고 갓 깨워놓은 소리가 하늘을 태울라 찌챙찌챙 담그고 두드려 울음을 잡는 장이처럼이야 쇠의 호흡 따라 뭉친 소리 풀어주.. 2024. 9. 3.
김광규 - 생선 장수 오는 날 생선 장수 오는 날                               김광규 소형 화물차에 확성기를 장착한생선 장수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온 동네가 시끄러워집니다 집집마다담을 넘고 창문을 열고 각종 해산물이쳐들어옵니다 참조기 아구 꽃게 병어 도다리 홍합가오리 주꾸미를 앞세우고 생선들이앞을 다투며 몰려옵니다 임연수 가자미여섯 마리에 5천 원*생태 갈치 먹갈치 세 마리에 5천 원오징어 속초 오징어 네 마리에 5천 원참치 한 마리에 2천 원꽁치 다섯 마리에 2천 원낙지 산낙지 두 마리에 5천 원싱싱한 동태 두 마리에 4천 원고등어 생고등어 다섯 마리에 4천 원자반 두 손에 4천 원왕조기 다섯 마리에 만 원. . . .80데시벨이 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한 마리씩 또는 몇 마리 씩 물고기들이 꼬리를 치며 아.. 2024. 9. 3.
김광규. [하루 또 하루]. 문지. 2011 - 김광규의 시에서는 비이성이 자리할 틈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의식이 눈을 감은 시간인 꿈조차도 이성적으로 풀어버리는 느낌이다. 김광규는 그렇다면 광대한 시의 원천을 버려두고 있는 것인가? 이 열 한 번째 시집에는 김태환의 지적처럼 약한 존재, 기미로 찾아오는 존재들에 대한 시들이 많다.   * 김태환 - 약한 존재의 시학 -- 시인의 열번째 시집에 부쳐119) 김광규의 시는 약한 존재들에게 바쳐진다. 약한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에 근접한 존재, 무의 미덕을 갖춘 존재, 자기가 없는 듯이 물러남으로써 타자가 숨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이다. 2024. 9. 3.
김광규 - 원 달러 원 달러             김광규 바다처럼 넓어 수평선 까마득한 호수누런 흙탕물 가로질러 거센 물결 일으키며관광객 10여 명 태운 모터보트가 달려간다목제 어선에 폐차 핸들을 붙인사제 유람선이다수상 가옥과 갈대숲이 금방 멀어지고배는 호수 한가운데 멈춰 선다가이드가 항로를 설명하는 동안작은 카누 한 척이 서둘러유람선으로 다가온다한 손에 아기를 안고또 한 손으로 노를 젓는 엄마 옆에서큰 뱀을 목에 감은 어린애가손바닥을 벌리며 원 달러원 달러. . . 외쳐댄다물 위를 떠돌며 사는선상 난민 가족이다관광객들이 미처 사진을 찍기도 전에시동을 건 모터가 사나운파도 일으켜 난민선 쫓아버리고뱃머리를 돌린다 원 달러원 달러 . . . 보트피플과 관광객들 사이의 유일한 통용어 원 달러가 모터보트 소음 속에 사라져버린다 김.. 2024.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