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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22

김광규 - 빗소리 빗소리                   김광규 반가워라 한여름 빗소리손가락 마디만 한 대추나무 잎한 뼘쯤 자라서 반짝이는 감나무 잎어느새 탁구공만큼 커진 밤송이쟁반처럼 넓은 후박나무 잎더위에 지쳐서 떨어져버린능소화 주황색 꽃잎 들을후두둑 다급하게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뒤따라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오랫동안 가물었던 논과 밭훅훅 열기를 뿜어대는 도심의 차도와 고층 아파트곳곳을 흠뻑 적시며플라타너스 가로수 통째로 흔들고때로는 돌개바람으로 창문을 부숴버릴 듯 두들기며장엄한 음향 들려주네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이 거센 비바람사이사이에 매미들의 합창꾀꼬리와 지빠귀들 틈틈이 지저귀고천둥소리 북소리처럼 울리며한나절 내내 또는쉬엄쉬엄 하루 종일땅 위의 온갖 나뭇잎들 모조리 씻겨주고섭씨 36도의 더위 시원하.. 2024. 9. 26.
박노해 - 그 한 사람 그 한 사람                     박노해 가을 나무 사이를 걸으며먼 길 달려온 바람의 말을 듣는다정말로 불행한 인생은 이것이라고 좋고 나쁜 인생길에서 내내나를 지켜봐 주는 이가 없다는 느낌내게 귀 기울이는 이가 없다는 느낌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나길을 잘못 들어서 쓰러질 때에도한결같이 나를 믿어주는 이가 없다는 느낌 내가 고난과 시련을 뚫고 나와상처 난 몸으로 돌아갈 때에도 아무도 나를 기다리는 이가 없다는 느낌 내가 빛나는 자리에서나내가 암울한 처지에서나내가 들뜨거나 비틀거릴 때나 나 여기 있다, 너 어디에 있느냐만년설산 같은 믿음의 눈동자로 지켜봐 주는 그 한 사람내 인생의 그 한 사람 박노해.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2022. -- '그 한 사람'은 당연히 '어머니'일 것.. 2024. 9. 25.
이윤학 - 가을 저녁 빛 가을 저녁 빛                                     이윤학 비탈밭 고구마를 캐 한 짐지개에 져오는 아버지 숨소리멀거니 밀물 든 서해바라보는 휘는 억새꽃누진 솔가지 타는 냄새낮은 산허리 감는 연기 이윤학. [곁에 머무는 느낌]. 간드레. 2024. * 누진 - 누지다 : 습기를 먹어 축축한 기운이 있다. - '한 짐'에서 행갈이를 한 것이 고구마의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3행의 '멀거니'라는 다소 생경한 표현도 '밀물'과 어울려 조응을 한다. 억새꽃은 서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휘기까지 한다. 여기서도 어떤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저녁연기. 클리세적인 노을이 빠진 것은, 고즈늑하고도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가운데에서도 먹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무게를 .. 2024. 9. 19.
탁구 시 두 편 탁구공                   서효인   내게 무엇을 받을 것인가 바라지 말고, 무엇을 줄 것인가에 대해, 공격과 수비에 대해, 낮과 밤에 대해, 파리와 나비에 대해 생각해 봐,  사각형의 세계는 늘, 받은 만큼 돌려준다, 독재자의 눈빛을 번득인다, 속임수를 쓴다, 모든 지나감을 아까워한다, 쉽게 탄식한다, 공을 주우러 가는 사내들, 화가 난 양이 된다,  주고받음의 문제에 대해, 작은 공에서 일어나는 회전에 대해, 사이좋게 나눠 갖는 서브의 권리에 대해, 종교인처럼 말이 많다,   저 너머의 세계로 당신의 공을 떨어뜨릴 수 있겠는지 생각해 봐, 네트마다 그려진 빨간 해골과 친절한 아침밥에 대해, 협박과 편지에 대해, 망루와 난망에 대해, 녹색의 세계는 반드시 서효인. [백 년 동안의 세계 대전.. 2024.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