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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422

김광규 - 치매환자 돌보기 치매환자 돌보기                          김광규 어려운 세월 악착같이 견뎌내며여지껏 살아남아 병약해진 몸에지저분한 세상 찌꺼기 좀 묻었겠지요하지만 역겨운 냄새 풍긴다고귀여운 아들딸들이 코를 막고눈을 돌릴 수 있나요척박했던 그 시절의 흑백사진들 불태워버린다고지난날이 사라지나요그 고단한 어버이의 몸을 뚫고 태어나지금은 디지털 지능 시대 빛의 속도를 누리는 자손들이 스스로 올라서 있는나무가 병들어 말라죽는다고그 밑동을 잘라버릴 수 있나요맨손으로 벽을 타고 기어들어와여태까지 함께 살아온방바닥을 뚫고 마침내 땅속으로돌아가려는 못생긴 뿌리의 고집을치매 걸렸다고 짜증내면서구박할 수 있나요뽑아버릴 수 있나요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지. 100-101.  - 어리석을 치, 어리석을 매, .. 2024. 9. 6.
김광규 - 생사 생사           김광규 방독면 쓴 방역요원들이 계사에사정없이 분무기로 소독약을 뿜어대고닭과 오리 수천 마리를 비닐백에 잡아 넣어한꺼번에 살처분한다조류독감 때문이다출입통제선바깥의 냇가에는어디서 날아왔나청둥오리들 한가롭게 무자맥질하며 놀고백로 몇 마리 한 발로 서서명상에 잠겨 있고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지. 2007. 111. - 인간의 필요에 의해 수천 마리씩 사육하고, 또 각종 전염병 때문에 한꺼번에 살처분하는 현실. 그 현실이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지는 않다. 2024. 9. 6.
김광규 - 땅거미 내릴 무렵 땅거미 내릴 무렵                            김광규 짙푸른 여름 숲이 깊어갑니다텃새들의 저녁 인사도 뜸해지고골목의 가로등 하나 둘 켜질 때모기들 날아드는 마당 한구석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밀려오는 어둠에 잠깁니다어둠이 스며들며 조금씩온몸으로 퍼져가는 아픔과 회한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혼자서 지긋이 견딥니다 남은 생애를헤아리는 것 또한 나에게 주어진몫이려니 나의 육신이 누리는 마지막 행복이려니그저 이렇게 미루어 짐작하고땅거미 내릴 무렵마당 한구석에 나를 앉혀 둡니다차츰 환해지는 어둠 속에서한 점 검은 물체로 내가멀어져 갈 때까지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지. 2007. 30. -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마당 한구석에 앉아 짙어가는 노년을 성찰하는 시. '환해지는 어둠 속'이라.. 2024. 9. 6.
김광규 - 가을 거울 가을 거울                 김광규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구름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빗물이 잠시 머물러조그만 가을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지. 2007. 24. - 시인의 섬세한 시선이 낙엽에 고인 빗물에 비친 세상에서 '온 생애'를 읽어내고 있다. 2024.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