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 및 감상407 김광규 - 한강이 얼었다 한강이 얼었다 김광규 1951년 정월 초나흘 멀리서 대포 소리들려오던 한겨울 꽝꽝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소가 끄는 짐수레와 리어카에 사흘 치먹을거리와 이불을 싣고 삐거덕거리며옷 보따리 머리에 이고 등짐 짊어지고더러는 애기까지 가슴에 안고수십만 피난민들 걸어서 한강을 건넜다눈보라도 강추위도 우리를 막지 못했다혹독했던 그 겨울 살아남아반세기가 지난 오늘눈발 흩날리는 강변도로 자동차로 달려가면서스무 개로 불어난 한강 다리 양쪽끝없이 늘어선 아파트와 고층 건물들 바라보니지금도 피난 행렬 눈앞에 떠오른다인해 전술에 쫓기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때보다이제는 오히려 두려움만 늘었나다리를 절면서 한 발짝 두 발짝 걸어갔던 얼음길지금은 편안하게 승용차에.. 2024. 8. 29. 김광규 - 남은 자의 몫 남은 자의 몫 김광규 무덤의 봉분을 둥그렇게 쌓아올리자, 어느새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죽은 이를 땅속에 파묻고 나니, 새삼 그를 이제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자와 생자는 죽은 날이 아니라, 파묻는 날 헤어지는 것이다. 조객들은 귀로에 하나둘 영구차를 내렸고, 절에 들러 위폐를 안치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가족들만 남았다. 평상시에 비하면 많은 식구들이 모인 셈이지만, 방과 마루와 부엌과 마당이 텅 비어 있었다. 한 사람이 떠난 자리가 그토록 넓을 줄은 몰랐다. 아들은 건넌방 구석에 쓰러져 잠이 들었고, 딸들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엄마를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간간이 훌쩍거리거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 2024. 8. 29. 김광규 - 처음 만나던 때 처음 만나던 때 김광규 조금만 가까워져도 우리는서로 말을 놓자고 합니다멈칫거릴 사이도 없이-- 너는 그 점이 틀렸단 말이야-- 야 돈 좀 꿔다우-- 개새끼 뒈지고 싶어말이 거칠어질수록 우리는친밀하게 느끼고 마침내멱살을 잡고싸우고죽이기도 합니다처음 만나 악수를 하고경어로 인사를 나누던 때를 기억하십니까앞으로만 달려가면서뒤돌아볼 줄 모른다면구태여 인간일 필요가 없습니다먹이를 향하여 시속 110km로 내닫는 표범이 훨씬 더 빠릅니다서먹서먹하게 다가가경어로 말을 걸었던 때로처음 만나던 때로 우리는가끔씩 되돌아가야 합니다 김광규. [처음 만나던 때]. 문지. 2003. 72-73. - '관계'를 잘 유지, 조정하는 것이 인생살이에 있어서의 중요한 지혜일 것이다. 모든.. 2024. 8. 27. 김광규 - 문밖에서 문밖에서 김광규 일곱 번을 여닫아야 드나드는 숙소에열쇠를 두고 나온 것은(흔히 있는 건망증이지만)물론 나의 잘못이었다등 뒤에서 문이 쾅 닫히는 순간열쇠는 나를 내쫓고스스로 숙소의 주인이 되었다낯선 거주자들은 관심 없이 내 곁을 지나갔다내가 오기 오래전부터 있었을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도 그대로 있을 값비싼 의류 상점들 예컨대모피 외투 전문점 포겐슈타인이나남성 의류 판매점 말로반 등낯익은 간판들까지 갑자기환영의 미소를 거두고적의를 드러냈다금방 이렇게 달라지다니지은 지 한 세기 반이 지난 임대 주택한때 작곡가 주페와 시인 베르펠이 살았다는합스부르크 시대의 건물 전체가 나를 모른 척했다여권과 전화번호 수첩까지 안에다 두고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외국의 도시에서숙.. 2024. 8. 26.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 10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