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이야기104 걸레를 들고 -- 이건청 마당은 깜깜했는데 가만히 서있으면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잘려진 사내의 귀가 툭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굉장한 창피를 느꼈다. 걸레를 빨기 위하여 물 가까이에 갔더니 물은 완전한 평형으로 정지해 있었다. 함부로 걸레를 집어 넣었다. 물이 마구 흔들렸다. 사내가 흔들려 보였다. 계단에 걸린 액자엔 얼굴에 붕대를 맨 사내가 정지해 있었다. 걸레를 들고 서 있었다. 모든 불은 꺼지고 귀가 잘린 사내가 붕대를 맨 채 서 있었다. 아무것도 자르지 못한 내가 걸레를 들고 서 있었다. ----------------------- 귀를 자를 고흐와 '걸레를 들고' 있는 화자의 대비가 묘한 긴장감을 준다. 2022. 3. 16. 고호의 귀 -- 원재길 물토을 메고 파레트를 흔들며 그림 속으로 들판 한가운데로 걸어간다 불이 붙고 있다 구름은 공기에 취해 팔월의 햇살에 취해 어지럽게 거푸 공중제비를 넘고 바람은 불길을 빨아들인다 부드럽게 들판이 끓는다 건초더미가 끓는다 붉은 차양 지붕이 끓고 나무의 물관 속에 든 물이 끓고 황토길과 구릉이 어지러워 날 붙들어 줘 신음하며 끓는다 가슴 살 그을린 여자들을 이끌고 고갱이 출애급! 외치며 달아난다 끝났어 너하고는, 너의 혼돈과는 사, 상종 않는다 어제의 벗이여 안녕 그는 들판을 더욱 불붙게 만들고 붓을 휘돌리고 마침내 면도날로 마구 긋는다 구름은 활딱 깨어나려다 치명상을 입는다 흰 가루를 게운다 나무는 토막으로 부러져서 끓는 물을 땅 위에 쏟고 건초더미는 무너져서 전속력으로 굴러가고 황토길은 속이 뒤집히고 구릉.. 2022. 3. 16. 별들이 반짝이는 밤 -- 1889, 캔버스에 유채 생 레미 정신병원 -- 원재길 저 친구 누군가? 환자. 그런데 저리 야밤에 그림을? 미쳤으니까. 눈빛은 맑군. 광자의 특증. 악다문 입술. 광자의 재산. 꿈틀거리는 그림 불타는 상상력. 광자의 미학. 건강이 나빠 보여. 광자의 천형. 연인도 혈족도 없는 모양. 차라리 그게 나아. 내일 그가 죽는다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으리. (이 그림 일년 후 화가 운명. 37세. 한때 그를 비웃었던 사람 한때 그에게 침 뱉었던 사람 한때 그를 병원에 가두었던 사람 장삿날 그의 영전에 들리지 않았던 모든 마을 사람 그들 모두에게 축복 있으라. 앞으로 단1분 동안만.) ----- 단정적인 어조로 고흐와 사회의 불화를 그려내고 있는 이 시는 그 감흥면에서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지 못한다. 2022. 3. 16. 참회록 -- 오탁번 이라는 젊은 날의 시를 다시 펴보니 정 말 눈물나네 일년 내내 콧물 흘리고 재채기하다가 그 때 그 시절의 이미지 만나니 정말 좆같이 눈물나네 오 랜만에 눈물 맛보네 너는 도려낼 귀가 있었지만 나는 지금 잘라버릴 정관도 이제 없네 뚝뚝 피흘리며 살아야 할 그 나이에 나는 비뇨기과에서 정관수술 받으며 치욕 을 흘렸네 예술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은 몹쓸 세상에 태어나서 너의 까마귀 이중섭의 까마귀 그림 걸어놓고 보지만 날개소리 울부짖음 들리지 않고 다만 하나 까마 귀 똥냄새뿐이네 오랜만에 예술이 된 여자의 살냄새 맡 으니 정말 눈물나네 목졸려 고문당한 나의 정충들의 찬 란한 반란을 보네 ----- 나이든 화자(혹은 시인)가 젊은 날의 예술혼이 사라진 현재의 상태, 그리고 '예술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은 세상'을 .. 2022. 3. 15. 이전 1 2 3 4 5 6 7 ··· 26 다음